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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밍줌마 Feb 18. 2023

33년된 아버지의 '손편지'

친정아버지 이야기

https://brunch.co.kr/@kopkunka/193


위글을 쓰면서 아버지 편지를 언급한적이 있다. 편지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독자분 계셔서..보관했던 손편지 슬며시 꺼내본다.


발신 날짜를 보니, 1990년 10월 27일이다.

정확히 33년 전이다.


브런치 작가 데뷔를 위해 처음 썼던 글이 '편지'에 관한 얘기이고, 이때 아버지랑 주고받았던 편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타이항공 입사 후, 방콕에서 향수병에 허덕이고 있을 때, 열심히 편지를 써주셨던 아버지 덕분에 많이 극복할 수 있었다. .


30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별일 없었다는 듯 선명히 살아있는 아버지의 필체를 보며 '종이와 펜'의 힘을 재확인해본다. 오늘 이 시간은 그냥 한번 아버지의 편지를 '필사'해보려 한다.

보고 싶은 딸에게!

무척 높고 맑고  푸르른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오후구나. 오늘도 여느 때처럼 과수원에 나가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네 엄마는 없고 , 시장기가 나서, 혼자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전하려 한다.


며칠 전에 너의 목소리를 듣고 무척 반가웠다. 가끔이나마, 네 목소리를 들으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단다. 그러면서도, 이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딸이기에 보물처럼 간직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보물도 자주 꺼내보면 닳고, 또한 누군가에게 도둑맞을까 하여 비밀장소에 간직하여 두는 것처럼 너도 이 아빠의 보물일진대 어찌 자주 꺼내보겠니? 오래오래 간직해 두었다가 살며시 혼자 꺼내보려 해.


요사이 아버지는 새벽 4시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져, 밖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본다.  가을의 새벽하늘은 무척 맑고 푸르며, 수많은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이는데, 서쪽하늘 네가 살고 있는 그곳은 별들이 띄엄띄엄 떠있는 걸 본다. 왠지 너도 저 별들처럼 외롭게 생활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이 아빠도 잠이 오질 않더라. 한편으론 너의 외국항공사 취업이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 혼자 먼 곳에 내버려 둔 거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네가 국민학교 다닐때, 아빠의 즐거움은 너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거였어. 하루 종일 과수원에서 일하다 저녁에 집에 가서 우리 딸 한글자 라도 더 가르쳐야지 라고 생각하면, 힘든 줄도 모르고 일을 했던 거 같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귀찮고 아빠를 피하고 싶었겠지?. 그러나 그 시절 아빠는 너를 꼭 공부 잘하고 현명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어. 이제 와선 후회랄까? 너무 극성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공부 때문에 너무 심하게 독촉하고 화를 냈던 기억 등이 떠올라 이 아빠 자신이 한없이 미워진다.


며칠 전에는 엄마랑 중문 부둣가에 생선을 사러 다녀왔다. 새벽 찬 공기를 마시며 부두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낚시하는 사람, 배일하는 사람, 우리처럼 생선 사러 온 사람들로 분주하더구나.

 맑고 푸른 바닷물에 잠시 한눈판 사이, 고깃배가 들어와서 생선을 보여주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싱싱한 놈들이었어.

갈치 고등어 오징어 등등 사서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요리해 주었지만, 맛이 없더라.

우리 다섯 식구 모두 모여 앉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님, 우리 딸이 앞치마 두르고 맛있게 요리해 주면 입맛이 확 돌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어. 네가 서울 살고 있으면 엄마가 잘 손질해서 냉동한 후, 아이스 박스에 넣어서 보내주었을 텐데... 미안해! 우리만 이렇게 맛있는 거 먹는 거 같아 맘이 불편하다.


딸!.. 외롭지?.. 외로울 땐 동쪽 하늘을 보렴. 마음이 힘들거나, 사람이 그리우면 동쪽 하늘을 보며 생각하여라.그 하늘 아래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위로가 될 거야! 이 아빠도 네가 보고 싶으면 서쪽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면 네가 왠지 곁에 있는듯하고 네 목소리도 들리는듯해!  이제 그만 울고, 항상 네 마음속에 '즐거움'이란 단어를 갖고 다니렴!


그래도, 요사이 '취업문제'가 대두될 땐 '우리 딸이 잘되었구나!'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너도 괴롭고 힘들고 고독한 시간들을 잘 극복해 냈기에 얻어낸 값진결과 라고 생각하고 응원한다.

앞으로도 다가오는 시련들을 현명하게 잘 대처하여 원숙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길 바란다.

부디,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말며, 요사이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게 빛내며 살기 바란다.



너의 웃음 띈 모습을 그리며 몸성히 있기를 바라는 아빠로부터.....

                                                                                         1990년 10월 27일.





편지를 필사하다 보니, 당시 생각이 떠오르며 가슴이 다시 뜨거워진다. (그때 나는 왜 그리 향수병을 앓았던걸까?ㅎㅎ)

갓 대학졸업한 어린 사회초년생이 어느날 갑자기 '태국'이라는 낯설고 물설은 외국에 던져져  있다는 기분이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거 같다. (물론 나의  여리고 예민한 성정탓도 있었을테고).

머나먼 외국에서. 서럽게 울며  걸려온  딸과의  '국제통화'를  짧게 끝내고 아빠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별은 아버지로 하여금 '편지'라는 새로운 소통의 창을 열게 했고, 아버지의 숨겨진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몹시 과묵하고 무뚝뚝하다고만 알고있었던 아버지의 이토록 섬세한 편지는 꽤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였으므로).  이렇게 브런치에 '똬악' 박아 놓았으니, 이젠 편지를 잃어버려도 덜 아쉬울 거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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