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타이항공 1기 20명 멤버들과, 우리는 기내에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이 외국여행은 처음이라, 꽤 긴장하고 흥분된 모습이었다.
휘황찬란한 외모를 뽐냈던 분들도 계시고, 나처럼 수수한 분들도 계셨다, 우리는 이제 한배에 탄 공동체로서 태국 방콕에서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인터넷도 없고 ,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던 시절이라 , 관련 서적도 잘 없고백과사전 찾으며태국에 대해서 정보를 얻었던 시절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우리는 방콕 도착 후, 타이항공 본사 근처 한 호텔에 투숙하며, 2달간의 승무원 교육을 시작했다.
스튜어디스는 비행기에서 승객에게 음료나 제공하는 정도의 단순 업무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각종 비상사태를 가정한 승객 탈출법, 환자 발생 시 응급처치 및 대처법 , 다양한 종류의 기내식 환자식 종교식, 그리고 온갖 종류의 칵테일 만들기 등 배워야 할게 정말 많았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도 정신을 초집중해야 했고 , CHAPTER 가 끝날 때마다 시험 보기, TEST FAIL 하면 재시험 , 재시험 통과도 안되면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며 겁을 주시기도 하니, 하루 수업이 끝나면 기진맥진이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내가 국제 매너를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고, 지금 어디 가서도 여러 분야에서 뒤처지진 않는 교양을 쌓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던건 분명하다.
또한, 우리는 태국이 엄청나게 더운 나라라는 말만 듣고 , 모두 매우 얇은 여름옷만 준비했는데, 본사 교육실은 냉장고 수준이었다. 강사들은 모두 두꺼운 재킷과 정장을 항상 입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에어컨 시설을 완벽히 갖춘 곳은 많지 않았는데, 태국 본사는 저체온증 걸릴 수준으로 에어컨을 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태국은 기름(석유) 값이 매우 저렴한데, 그 이유가 중동지역이 쌀이 귀하여, 연중 3 모작까지 가능한 태국과 협약하여, 쌀을 무제한 수입하는 댓가로 석유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공급해 준다고 했다.
그러니 태국 입장에서는 낭비다 싶을 정도로 (아예 문까지 열어놓고),백화점 관공서 공공시설할 거 없이 에어컨을 틀어대고 있었다.
거의 모든 태국인들은 실내에서 두꺼운 재킷이나 카디건을 입고 생활하고 있었고, 얇은 옷 밖에 없던 우리는 덜덜 떨며, 교육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태국 방문할 때는 두꺼운 옷 하나 정도는 꼭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스파르타식 교육은 계속되었고, 하루를 꼬박 시험의 긴장과 에어컨의 추위 속에 호텔로 돌아오면우리를 기다려 주는 건 한국에서 도착한 가족들의 편지였다.
이건 무슨 군대 간 군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편지처럼 몇 번을 읽고, 울기도 하고, 향수병에 젖었다. 그리움에 전화를 하고 싶어도 국제전화가 너무 비싸고, 교환원을 통해 전화를 요청한 후 기다리고 하는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편지가 유일한 소통의 매개체였다.
태국 음식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니, 몇 종류의 음식을 테스트해보고 입에 맞으면 그 음식만 허구한 날 먹는 등, 교육 스트레스, 외국생활의 불편함 등으로 살이 빠지는 사람, 아픈 사람 등등이 생겨났다.
교육의 고단함과, 한국에 대한 향수병으로 "과연 태국이라는 나라에 정 붙이고 살 수 있을까? 외항사 근무는 외국에서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결정을 했어야 했다!"라는 소심한 후회가 드는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핸드폰만 두드리면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태국처럼 모든 사람이 광분하며 좋아하는 여행지 가서 “도대체무슨 헛소리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땐 그랬다.
울고 웃으며, 두 달이라는 시간은 흘렀고, 이제 우리 20명은, 타이항공 제1기 멤버로서, 그리고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오는 산업역군으로서, 타이항공을 이용할 한국인 승객들을 위해 봉사할 자질을 완벽히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