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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한 언니 Jan 19. 2023

생각의 왜곡에서 벗어나 바보처럼 살기를 소망하며

20230119 마태복음 9:1-8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6)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중풍환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라 명하신다. 이 모습을 보고 당시 소위 지식층에 속하는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비난한다. 그들의 얕은 지식으로는 죄 사함의 권세는 하나님께만 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5)고 

그들을 꾸짖으며 예수께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생각을 그리고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우리 내면의 생각이 행동으로 이행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보이는 행동보다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생각’을 먼저 아시고 또 보신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력은 보이는 세계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 믿을 때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3차원을 살아가지만 

실상은 2차원의 시각에 머물러 일상의 제한적이고 왜곡된 모습을 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과 같이 나 또한 그렇게 보고 익힌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며 

나와 세상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렇게 세상을 비판하고 가족을 비난해 왔고 나 자신을 억눌러왔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줄 착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교만이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은 언제나 적대감을 일으킵니다. 사실은 교만 그 자체가 적대감입니다” 라 하였다. 


나의 부족하고 왜곡된 ‘생각’에서 비롯한 지식이 교만을 부르고 

그 교만이 나 자신과 타인을 향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곧 하나님을 향해 감사함이 없고 구할 것도 없는 마음의 곤고함으로 이어졌다.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라는 말씀 대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로 그를 살리신 예수님의 그 깊고도 크신 사랑이 있어 참 다행이다. 


내 앞에 예수님이 오셔서 

'네 좁은 지식과 교만한 생각을 버려라' 하고 명령하신다면

순간 ‘예’ 하며 순종할지 모르나, 

나의 그러한 행위 하나로 근본적인 죄성은 결코 벗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옳다' 하는 그 왜곡된 지식과 시선아래 

아이들을 얼마나 비난했는지 모른다. 

그간 그 왜곡되고 교만한 생각이 부어준 지식 아래 

얼마나 많은 순간 나는 ‘피해자’ 당신은 ‘가해자’라는 

좁아터진 프레임 속에 세상을 가둬두었을지 헤아릴 수가 없다. 


앞으로 나는 어떠한 면에서 때때로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구구절절 ‘옳다’, ‘그렇지 않다’ 하며 따지며 세상을 가두어 두지 않으면 좋겠다.

내 눈에 보이는 것, 경험, 생각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면 좋겠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3차원도 4차원도 아닌 예수님의 시선을 가진 자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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