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30 마태복음 12:1-13 안식일의 주인
20230130 마태복음 12:1-13 안식일의 주인
[바리새인들과 꼭 닮은 나의 ‘해야 한다’가 결론은 ‘정죄와 분노’]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 12:6)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 참 대조적으로 보이는 오늘의 본문이다.
첫째, 바리새인은 율법에 기준을 두고 세상을 향한 시선이 율법에 맞춰져 있다.
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병든 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일은 율법보다 위에 있다.
제사(율법) 보다 자비를(마태복음 12:7) 더 위에 두신다.
둘째, 율법이 기준이 되어 세상을 평가하는 바리새인들이 보내는 안식일의 주인은 율법을 잣대로 평가질하는 그들 자신이다.
반면, 예수님은 예수님이 성전보다 더 크심을 말씀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알려주신다.
셋째, 율법에 빗대어 자신이 주인이 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말과 법을 거역하는 자에게 분노한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 논의한다(마태복음 12:14)
반면,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주인 된 자신에게 조차 함부로 가르치며 분노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시고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분노치 않고” 알려주신다.
이렇게 대조적인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또다시 바리새인과 같은 내 모습을 보게 한 오늘의 말씀이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 모습은 바리새인을 아주 꼭 닮아있다.
정해진 율법이 있기에 나 자신을 향해 혹은 상대를 향해 마음 상태가 어떻든 공감 따위에 신경 쓰기보다는,
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 혹은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내 머릿속은 가득 찬다.
예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일러주시는 “자비”(마태복음 12:7)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제사”의 행위만 있을 뿐이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아픈 곳을 위로하는 것이 먼저인데,
“해야 한다”라는 제사 앞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을 살피는 일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성령이 아닌 “내 생각”이 내 삶 전체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제가 이뤄지지 않을 때, 예외 없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분노”가 시작된다.
‘내 말을 듣지 않다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다니’로 분노하는 나는
‘율법을 지키지 않다니’에 예수를 죽일 궁리를 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하나 없다.
'자비'가 우선인 예수님과 같이
내 마음과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예수님이라면 분노할 것도 없을 텐데
내 마음의 ‘주인’은 잠시 잠깐의 묵상과 기도시간을 빼면 ‘나’로 돌아오곤 한다.
세상을 행해 그리고 인간을 향해 시선을 바꿔 돌리자.
‘해야 한다’가 아니라 ‘자비’가 우선이 되도록 시선을 돌리자.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리 하셨듯,
아픈 자를 치유하고 배고픈 자에게는 먼저 먹여줄 수 있도록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해야 한다’를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기도, 예배, 일상의 각종 의무들 모두 성실히 잘해 내야 하는 것들이고
꾸준히 해 나아가야 하는 바람직한 율법과 같은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행위 자체가 결코 내 삶과 영의 주인이 되도록 부추겨서는 안 된다.
그에 따르는 결론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결국 성령이 떠나가며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마태복음 12:12) 하시는 예수님 말씀 따라
가장 약자인 아이들에게 그리고 늘 수고하는 남편을 포함하여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인간’인 내가 ‘인간’인 그들을 바라볼 때
주 안에 내가 귀한 만큼 그들이 귀한 줄 먼저 가슴 깊숙이 새기고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주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시니,
인간인 내가 그 어떤 잣대로도 인간을 판단도 강요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어떤 생각보다도 ‘당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데’의 마음이 우선되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