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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김 Sep 25. 2024

추락 후 다시 날다- 완벽한 라흐마니노프

위대한 열등감

 

          "베토벤의 위대한 작품 앞에서도 끄떡없었는데, 톨스토이의 비난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아."

 

진중한 표정과 굳게 다문 입술, 꼭 쥔 손이 그의 작품을 향한 굳은 결의와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 누구의 작품보다 화려한 열정 그리고 인간의 깊은 고뇌가 느껴지는 그의 작품입니다. 그는 어떻게 작품마다 삶의 모든 감정을 담은 듯 풍부한 곡을 평생 완성해 갈 수 있었을까요?  



 

 

이른 성공이 부른 깊은 절망의 그림자


"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했다."
 

1897년, 24세 청년의 라흐마니노프는 야심 차게 교향곡 1번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졸업 작품으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발표한 뒤 그의 실력을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합니다. 연 이어 발표한 그의 첫 오페라 Aleko와 프렐류드 C# 단조 등이 학계와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천재 청년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놓인 듯했습니다. 이후 불과 5년이 지난 때에 그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혹평을 듣게 됩니다. 바로 그의 교향곡 1번과 함께 말입니다. 지금은 작품의 깊이를 갖고 있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사랑받는 곡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처럼 전통적인 낭만주의 스타일을 선호했던 1890년 말인 당시에는 전통적인 구조를 다소 벗어나는 작품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나 봅니다.


당시 유명한 비평가 세자르 큐이는 이 작품을 두고 "지옥의 콘서바토리에서나 연주될 법한 곡"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당시 러시아 5인조(The Mighty Handful)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19세기 러시아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군인이기도 했던 큐이는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 운동을 주도하며 큐이를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등 음악가들과 함께 러시아 전통 음악의 정신을 작품에 담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런 큐이에게 전통적인 러시아 교향곡 형식을 벗어난 교향곡 1번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려웠을 테지요.


1901년 28세의 청년 라흐마니노프

                                         

자신보다 무려 30여 년 선배이자 음악계 주요 인물들과 함께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던 선생님의 잔인한 평가에 고작 24세 청년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전통주의자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한 라흐마니노프는 3년 동안 작곡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음악적 자아를 잃은 것처럼 느끼며, 깊은 우울증에 빠져 어떤 음악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속에 갇혔습니다

음악가로서의 자아를 잃은 듯했던 그를 향해 그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은 그가 완전한 침묵 가운데 있다고 전하곤 했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 그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명 연주자들과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복잡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 – 어린 시절의 불안정함

라흐마니노프의 어린 시절은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실제로는 불안정함과 상실로 가득했습니다.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가문은 파산에 이르렀고, 두 명의 누이를 잃는 큰 상실을 겪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 루보프 페트로브나 부톱은 러시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고, 그 덕분에 라흐마니노프 가족은 처음엔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 바실리 라흐마니노프는 장교로서 사회적 지위와 여러 경제적 혜택을 누렸습니다. 더불어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아내의 재산으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의 낭비벽은 멈출 줄 몰랐고 재산관리는 뒷전으로 한 채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곤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가문은 파산에 이르렀고, 가족은 넓은 영지와 재산을 모두 잃게 됩니다. 그는 파산 이후 견디지 못해 가족을 떠나버립니다. 라흐마니노프와 두 누이를 모두 홀로 갑작스럽게 감당하게 된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어린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의 친척집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런 그의 유년시절은 소년 라흐마니노프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에 충분한 환경이었습니다.


가난과 고난이 이어준 스승, 즈베레프

하지만 위대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될 그에게 이 가혹한 고난은 운명처럼 엄격한 스승 즈베레프를 이어준 계기가 됩니다. 모스크바의 친척 집으로 보내져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 니콜라이 즈베레프를 만나게 됩니다.


즈베레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저명한 피아노 교사였고, 음악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능한 젊은 재능을 발굴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가르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어린 라흐마니노프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스승 즈베프레와 그의 제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소년 라흐마니노프


즈베레프와의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10시간 이상의 연습과 철저한 음악 교육은 라흐마니노프를 단련시켰고, 이는 그의 음악적 기초를 완성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는 그가 훗날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능력 있는 스승일지라도 라흐마니노프의 큰 열망과 재능을 담지는 못했나 봅니다. 즈베레프는 라흐마니노프를 최고의 실내악 연주자로 훈련시키고자 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고 싶어 했습니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겨 결국 스승 곁을 떠납니다.


피아노, 유일한 안식처

삶의 혼란과 상실 속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것은 피아노였습니다. 유일한 정서적 안식처였던 피아노 앞에서 그는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고 고통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고요하고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세상의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나와 나의 소리만이 존재했다."
 훗날 라흐마니노프가 전한 고백입니다.
 
 

"톨스토이, 그에게 배신당하다" – 존경하던 문호의 혹독한 평가


그토록 쉼이 되어준 그리고 삶의 이유였던 음악이었기에 교향곡 1번에 대한 혹평은 그를 심히 괴롭게 합니다. 푸근한 어른의 조언과 사랑이 필요했을까요?

세자르 큐이의 독설에 심한 상처를 입은 그는 무려 45세 연상이었던 72세의 노인이 된 대문호 톨스토이를 찾아갑니다. 존경받는 작가이자 철학자인 대문호에게 뭔가 위로와 따뜻한 격려의 말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년의 선배에게 받은 상처를 더 깊게 패이는 말만 듣게 됩니다.


그의 역작 교향곡 1번을 들은 톨스토이의 첫마디는 "이런 음악이 대체 누구에게 필요한가?"였습니다. 그 누구에도 불필요한 쓸데없는 작품이라며 매우 직설적인 비판을 던진 겁니다. 사회 개혁가이기도 했던 그였기에 예술의 감성적 가치보다 사회적 기능에 중점을 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실제 톨스토이의 작품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예술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이나 미적 만족을 넘어서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가르침을 가져야 함을 전합니다. 예술이란 사람들의 도덕적 인식을 높이고, 사회를 개선하는 도구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톨스토이는 비도덕적이고 실질적인 사회적 효용이 없는 예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습니다.


반면, 음악이 유일한 안식처였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는 그의 개인적인 고뇌와 감정 그리고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음악은 삶에 대한 고뇌를 담아내고 모든 열정을 쏟아낸 공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대가의 예술적 견해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독설은 독설일 뿐, 이 말은 이미 무너져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자존감을 더 깊이 찌르며,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시간이 지나 톨스토이는 자신의 부적절한 비판에 대해 젊은 청년에게 사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년의 대문호 앞에 위대한 청년 라흐마니노프는 말합니다.


“그 위대한 베토벤의 작품 앞에서도 주눅 들고 상처받은 적 없던 제가 저 때문에 상처받겠습니까?”


젊은 열정의 결의와 함께 세상의 소리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를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의 비판과 비교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은 후,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약 3년 동안 작곡 활동을 중단하게 되지만 이 침묵은 그의 열정과 굳은 결의는 오히려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성장시킵니다. 이 기간 동안 심리치료를 받으며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이 치료 과정을 통해 그는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합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의 악보 표지, 작곡자가 2대의 피아노를 위해 직접 편곡한 것. 1901년 모스크바에서 A. 구타일에 의해 출판됨 (판번호 8104).


1901년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대중과 평론가들 모두로부터 큰 찬사를 받습니다. 이 작품은 러시아 낭만주의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라흐마니노프가 다시 음악계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됩니다.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서정적인 선율과 강렬한 감정적 표현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그가 느꼈던 고통과 회복의 과정을 닮았습니다.


단순한 성공을 넘어 음악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대중과의 신뢰를 다시 쌓는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명성과 영향력을 지닌 권위자의 비평은 늘 위축되게 만들지만 비평은 비평일 뿐 열정을 향한 정체성까지 무너뜨릴 수는 없음을 봅니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을 걸어갈 때 잠시 동안의 고요한 침묵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33) Rachmaninoff plays Piano Concerto 2 - YouTube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2번

연주: 라흐마니노프(작곡가 직접 연주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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