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의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by 세네카

유튜브 알고리즘에 쫓겨 무의식적으로 가수 조성모 노래 모음을 클릭하자 오랜만에 말 그대로 귀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수많은 노래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곡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어릴 적엔 ‘아시나요’ 와 ‘To heaven’ 에 푹 빠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곤 했던 ‘가시나무’ 가 재생되자 6분 13초의 시간 동안 나의 기억은 서툴고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그 어린 시절을 재생하고 있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강력한 이 도입부를 듣자마자 생각에 잠겨버렸다.


당시는 그 가사의 의미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어서 그랬는지(물론 공감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멜로디에 푹 빠졌던 듯하다. 하지만 서른 초반쯤의 나이가 되어 이 노래의 도입부를 듣자마자 꽂혀버려 스페이스 정지 버튼을 누른 채 혼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사가 매우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서야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온종일 맴돌던 가사가 이런 질문으로 바뀌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라는 질문. 정말 내 속엔 내가 모르는 내가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건지. 그걸 알기 위해선 뭔가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것인지?


평상시의 나답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으로 인해 자신 스스로 당황했던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외모나 성격적인 면에서 나의 취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성과 연애를 해본 경험, 발표라면 치를 떨며 손사래를 치던 내가 남들 앞에서 어색한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나름의 순탄하고 안정된 발표로 미팅을 마쳤을 때의 뿌듯했던 기억, 돈과 물질로부터 나름 초연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내가 어느새 셀럽들의 착용 아이템이나 전용 스포츠카에 홀린 나머지 폭풍적인 가격 검색을 시전한 뒤 박탈감을 느껴 혼자 좌절하고 이내 그들을 남몰래 선망하는 모습은 나 자신에게는 매우 낯설고도 혼란스러운 순간이다.


나도 나를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에 더해 연일 비처럼 쏟아지는 언론 매체들의 편향된 보도는 우리를 미혹하여 여러 사회 전반의 이슈에 있어 근시안적 사고 틀에 가두는 강력한 자물쇠의 기능을 한다. 또한 내가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 대한 소유욕을 자꾸만 자극해 소비 심리를 부추기는 광고나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음에도 자신의 외모에 끝없이 불만을 갖게끔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 등으로 인해 나만이 가진 고유한 신념과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각한 건 현재 자기 분수도 모르는 자들이 자신에게 과분함을 깨닫지 못하고 억지로 높은 자리를 꿰차고 앉아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걸 보면 내가 누군지 제대로 아는 일은 개인의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 재력 등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인 듯하다.


수많은 외부적,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딱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려야 할 건 버리면 된다. 다만 스스로 지켜야 할 신념과 자세, 가치관으로 자신만의 중심을 갖는 일은 필요하다. 이 중심이 바탕이 되어야 세속에 물들지 않고 흔들림 없이 나만의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 막연히 누군가를 쫓아가는 건 내 인생이 아니니까. 많이 경험하고 부딪혀보고 고민해보고 사유해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거기서 배우고 느끼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렇게 좁고 긴 길을 더듬으며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에게 도달할지 모른다.

이전 12화보고 싶은 얼굴들, 그리움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