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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패커 에지 Dec 24. 2022

[중국기행] 서역으로 벗을 떠나보내는 관문, 양관

서역으로 가는 쭉 벋은 길 양관대도 (阳关大道)

둔황에 대해서 알아볼 때 우리의 경주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도시 전체가 여러 유적이 분포되어 있고 곳곳에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어 며칠을 혹은 몇 달을 살더라도 아직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일정 중 머무는 시간을 조금 길게 잡은 곳이다.


둔황은 도시의 분위기만으로도 고대의 역사와 현재의 내가 한 공간에 있는 기이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공부를 해온 만큼 책을 좀 더 읽어본 만큼, 작은 공간 하나하나 소품 하나하나가 새로운 드라마가 되어 눈앞에 3D로 펼쳐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장르는 시대극이나 무협이랄까.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 남쪽길의 최초의 세관인 양관이 있는 곳이고 서양과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창구가 된 곳이다. 그래서 둔황 그리고 양관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몇 명의 인물을 알면 한결 재미있는 시선으로 유적을 볼 수 있다. 삼장법사로 유명한 현장법사,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그리고 이곳을 노래한 시로 현재도 중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왕유가 있다.


당나라 태종•고종 때의 승려(602~ 664년)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유기'의 중심인물인 삼장법사의 원형이며, 많은 경전의 번역가로 유명하다. 원래 삼장은 불경의 3요소, 즉 경장, 율장, 논장을 모두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현재도 삼장에 통달한 삼장 법사는 매우 드물다고 하니 그 지식의 높음은 감히 예측하기가 힘들다. 서역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아 죽음을 무릅쓰고 가는 길이었으나 그 험한 고행길을 마다 하지 않고 떠났다가 배움을 이루고 당태종 이세민 황제의 요청으로 귀국할 적에 현장법사가 양관을 통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중국인들에게 현장법사는 석학으로의 역사적인 인물의 존재감이 있지만 서유기라는 소설의 주요 인물로서 매년 서유기 시리즈가 영화화되고 외전이 나올 만큼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인물인만큼 그 관심도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70-80년대생의 경우 서유기를 재미있는 소설로 읽어본 경험이 많기도 하지만 허영만 작가의 ’ 날아라 슈퍼보드‘ 만화 시리즈로 유명해서 '아 그게 그거였구나' 정도 이해하는 편인데, 요즘 친구들은 서유기를 읽은 적도 없다고 해서 정말 놀란적이 있다. 농담인가 싶다가도 시대가 변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더 이상 다들 아는 지식이 아니어서 대화의 단절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다.

양관으로 가는 길에 조금은 갑작스레 나타나 있는 삼장법사상이지만 이걸 애들한테 설명하는데 한참을 걸리고 나니, 집에 돌아가면 꼭 서유기 영화 한편 하고 날아라 슈퍼보드 좀 틀어줘야겠다. ^^


서역으로 가기 위해 험하고 힘든 실크로드 고행길을 다녀온 삼장법사상

돌을 얹어 소망을 비는 형태는 우리와도 비슷해 보이는데 돌마다 자신의 소망을 써서 올려 두었다. 대체로 키워드는 건강과 성공.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어느 정도 포기 해야 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공을 어느 정도 포기 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 하는 나로서는 참 모순이 있어 보이는 소망이지만 슬쩍 나도 돌하나 얹으면서 성공과 건강 두 가지를 함께 빌어 본다. 들어주시려나…  

서역으로 향하는 길. 돌무더미에 다들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어본다
돌에 소망을 쓴 것이 주로 건강, 성공인걸 보면 다 비슷한가 보다

왜 이런 곳에 삼장법사 동상이 있나 했더니 이곳에서 바라본 동산? 혹은 언덕의 형태가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이라고 한다.

약간의 억지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긴 시간 저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도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사람이 누워 있는 얼굴, 가슴, 배의 형상으로 보여서 불심을 가지고 태양이 뜰 때 바라보게 되면 엄숙함을 느낄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실제 사람이 누워 있는 형상이다. 부처의 형상으로 여기고 경건하게 소원을 빌어보자.

양관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건조실. 둔황을 비롯한 이 지역은 건조한 기후로 인해서 말린 과일이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당도 높은 포도를 말린 것이 유명하다.

저렇게 벽돌을 쌓아 바람만 통하도록 만든 구조물에서 건조한 기후를 이용하여 말려 판매한다. 먹어본 바로는 딱히 구매할 아이템이 없는 둔황에서 그래도 만족스러웠기에 오가는 길에 혹은 휴게소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사 먹어도 좋겠다. 2~3종류 포도 말린 것을 사 와서 지금도 맥주 술안주에 잘 먹고 있고 금액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서 손 가는 대로 사는 것도 좋겠다.

포도 건조실. 둔황의 건조한 기후를 이용해서 과일을 말리는 공간.


숙소에서 약 한 시간가량 달려서 도착한,

통행이 편리한길 혹은 탄탄대로의 의미로 쓰이는 사자성어인 양관대도 (阳关大道yangguandadao) 의 본래 뜻인 양관의 큰길에 드디어 도착했다.


양관과 옥문관은 서역으로 나가는 통로가 된 지금으로 따지면 세관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북쪽길을 따라가려면 옥문관을 지나고 남쪽길을 따라가려면 이곳 양관을 지나야 했다. 옥문관은 옥파는 상인이 밤에 보라고 야광옥을 그 위에 붙여 두어서 옥문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낙타를 탄 상인이 옥문관을 지나려는데 낙타가 병이 들어 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상인이 옥을 바쳐서 관문의 신을 위로했고 낙타가 병이 나았다고 옥문관이라고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

옥문관과 양관 모두 보기에는 힘들어서 이번 일정에서는 시설물이 재현되어 있고 박물관이 있는 양관만 방문하는 것으로 스케줄을 잡았다.


이곳은 골동품이 많이 나와서 古董灘 gudongtan 구동탄 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옛터 위에 양관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들여온 관문이 바로 양관이고 , 양관과 연관된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이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불리는 한나라의 장국 장건이다.  


예전 양관의 모습을 복원하여 여러 시설물들을 만들어 두었다.
양관 박물관. 실크로드에 대한 여러 가지 역사 설명과 자료가 있다.

박물관을 들어서자마자 말을 탄 장건 상이 있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동서 교역의 길이 처음 열린 것은 한나라 무제 때 장건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는 북쪽으로는 텐샨산맥, 남쪽으로는 쿤룬산맥이 그리고 그 사이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어 접근하기가 어려웠고 한나라당시는 중간에 흉노 세력까지 가로막고 있어 동서 교통로를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무제는 이를 막기 위해 반 흉노족 동맹을 위해 장건을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출전한 장건은 고비사막을 우회하는 길을 가면서 흉노족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흉노의 왕인 노상선우는 그를 죽이지 않고 흉노 땅에 살게 하고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장건은 자식을 낳아 기르며 10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기회를 봐서 탈출을 하게 된다.  탈출을 하여 본래 목적인 동맹을 위해서 서역의 대월지국을 찾아가지만 동맹은 실패하게 되고 귀국 중에 다시 흉노에게 잡혀서 1년간 억류 되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냥 실패한 사신 같았지만 장건이 다시 흉노에 1년여 기간 억류되어 있을 때, 노상선우가 이번에는 자신을 죽일 줄 알았으나 이번에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옛날처럼 흉노출신 아내와 자식을 부양하며 함께 살도록 선처를 해 주었다. 그러나 마침 병을 앓던 노상선우가 죽고 좌록리왕이 태자를 몰아낸 후 왕위를 빼앗았다.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장건은 아내와 자식까지 데리고 노비 감보와 함께 탈출해, 흉노 세력의 감시망을 벗어나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장건이 대단한 건지 적군이지만 장건을 살려두고 가정을 꾸미게 한 노상선우가 더 훌륭한 건지 판단이 쉽지는 않지만 지금의 중국사에서 한나라에 대한 자존감은 우리 상상 이상이므로 판단의 시선은 한나라를 중심으로 평가가 되는 편이다. 암튼 장건은 비록 대월지국에서 동맹을 얻어내지는 못하였지만 10년간의 억류 생활을 한 인고의 세월 동안 서역인들에게 신뢰를 심어 주었고 이를 통해서 다시 흉노에 잡혔을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처음 같이 떠난 100명의 수행원 중에 2명만이 생존해 귀국하는 처참한 성적을 보여 주었지만 장건 사후 서역의 사신과 대상들이 문물이 발달한 한나라와 교역을 시작하면서 동서의 문명 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동서 교통로의 숨통을 틔워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할 수 있겠다.


이 소재는 중국 내에서도 여러 책과 영화로 만들어져서 아직도 회자되고 있고 무엇보다도 10년간의 포로 생활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다루면서 군인이자 여행가이자 외교 사신이기도 했던 장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 장군상.

양관은 세관 역할을 하였던 만큼 실제로 신분을 확인하고 통과 도장을 찍어 주면서 출입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 상품화 하여 재현하고 있고 주로 자녀를 둔 가족 관광객이 많이 체험을 한다.

이곳을 나서게 되면 이제는 정말 실크로드를 지나 서역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유적을 보기 위해 별도 비용을 내고 마차나 낙타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전기셔틀버스를 이용해서 봉수대까지 가게 된다. 이곳에 올라 보게 되면 정말 양관만 나서면 그야말로 고난의 시작인 사막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만 넘어서면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시작이니 서역을 가기 위해 양관이란 곳에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싶다.  

양관의 옛터. 여기서 앞으로 갈 길을 보면 정말 막막함 뿐이었을 것 같다.
양관의 봉화대 유적. 2000년이나 지나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때의 실크로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이 양관을 지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가기에 여러 마음이 교차했을 텐데 , 여기서 이런 이의 마음을 글로 잘 표현하여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얻어낸 당나라 시인 왕유라는 인물이 나온다. (시선 이백, 시성 두보와 함께 3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送元二使之安西-渭城曲

(송원이사지안서-위성곡)


渭城朝雨浥輕塵 , 客舍靑靑柳色新

위성의 아침 비 먼지를 가벼이 적시어,

객사의 푸른 버들 그 빛 더욱 새로워라.

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그대에게 한 잔 술을 다시 권하나니,

서쪽 양관으로 나가면 친한 벗 없으리라.


또 다른 의역 내용을 보면

(위성땅아침 비가 길을 적실 때 주막집 버드나무 싱그러운 잎새)

여보게, 한잔 더 들게나. 서쪽 양관을 나서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적막천지 아니던가?


결국은 술인가 싶기도 하다가, 지금처럼 소식이 전해 지는 게 비교적 용이한 시대에 사는 것도 아닌데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 친한 벗을 보내야 한다면 그야말로 그냥 이번생에는 못 볼 수 있으니 술 한잔 하라는 뭔가 모르게 가슴이 벅차면서 눈물이 난다고 할까.


먼 길 떠난 친구를 위해 한잔 생각 나는 날이다. 

한 손엔 술잔을 한 손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시를 읽어 보면 상황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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