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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진석 Sep 11. 2024

아버지의 중요성

대립항 개념, 현상과 실재, 무신론자들



어제, 책을 하나 읽었다. 주제가 대립항에 관한 것이었는데, 구조주의 개념과 관련해서 개념을 풀어주는 내용이었는데, 좀 어려웠다. 그래도,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현상’이 있어야 ‘실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2 사도들이 예수님을 '실재'로 믿는 데에는 ‘부활’이라는 현상을 실제로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역사적 사실로써 증명되신 분이기에 이를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을 해보았다.


 그 시작은 ‘예수는 역사다’ 영화에 나온 내용이었는데, 미국정신분석가 협회 회장이자 퍼듀 대학교 인간심리 권위자인 로버타 워터스 심리학 교수가 영화에서 말하길,



아버지가 어렸을 때 죽었거나, 이들을 버렸거나, 폭력적이었던 철학자들의 극단적인 무신론자 비율이 높다고 했다. 유명한 무신론자인 중에는 아버지가 일찍 죽은 프리드리히 니체장 폴 사르트르, , 그리고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이들에게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성인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신과의 관계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나는 예전에 봤던 이 영화내용이 떠오르면서 글의 처음에 말했던 '대립항' 개념이 떠올랐다. 대립항이란, 대립하는 두 개념을 뜻하는데, 가령, :바다, 하늘: 이런 식이다. 즉, 아버지:아들도 대립항이 형성되는데, 이 대립항에서 아버지라는 존재와 아들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두 관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신을 믿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만큼, 무신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라고 비방하는 이론을 내세운 사람이 니체이다. 그런 니체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죽었다고 하는데, 니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극단적인 무신론자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난 이 해답을 현상과 실재의 개념에서 알 수 있었다. 내가 눈에 보이는 현실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거리가 있고, 냉랭하고, 지지나 사랑이 부족한 관계로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가 실재한다고 인정하기 쉬울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현상이 있어야 실재가 있다고 믿기 쉬울 것이다. 가령, 아버지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를 꼭 안아준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그 속에서 편안함과 만족을 느끼고 있다. 이는 현실 속에서 사랑받는 현상을 겪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날 사랑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현상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랑받은 경험으로써 ‘현상’이 없으니, 신적인 존재가 사랑을 주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든 생각은 무신론 철학자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철학자들은 매우 지적이고 똑똑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논리적인 철학적 이론으로 현실을 합리화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비참한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자신의 지성으로 매우 뛰어난 철학이론으로 반박하려고 노력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인간이 줄 수 없는 온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신 분이시며, 우리는 결코 인간의 사랑에 갈급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무신론자들이 알고 이론으로 현실을 합리화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존재임을, 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깨닫고, 소중한 사람들과 더 풍성한 인생을 살다가 천국에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위에서 언급한 로버타 워터스 박사는 불가지론자인데, 불가지론자는 무신론자와는 다르게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지식으로 신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을 증명하기에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어찌 보면 겸손한 이론이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경험적인 것의 존재이신 하나님을 사람의 경험으로써의 현상으로 실재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세상의 어떤 학문으로도 경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의 개인적인 삶에서의 변화로써의 현상으로 하나님이라는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불가지 하지 않다. 믿음만이 하나님을 증거 한다.
히11:1‘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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