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리의 정원>
▲ 영화 <모리의 정원>의 한 장면.
ⓒ 진진
자극적인 이야기 없이도 감탄사를 남발하게 만드는 영화 한편이 눈길을 끈다. 새, 고양이, 사마귀, 물고기의 일상과 이를 지켜보는 한 노인의 모습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99분의 러닝타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그동안 소홀하게 지나쳐온 것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모리의 정원>이 그 주인공이다.
2018년 중국 금계백화장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및 최우수 외국인감독상을 수상한 <모리의 정원>은 30년 동안 정원을 벗어난 적이 없는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츠의 자연주의 철학이 담긴 일본 영화다.
2002년 단편 <냄비와 친구>로 미토단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오키타 슈이치 감독은 2012년에 개봉한 <딱따구리와 비>로 제24회 도쿄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두바이국제영화제에서는 일본영화 처음으로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오키타 슈이치 감독은 모리가 인생 말년 30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과 정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영화 제작에 나섰다.
영화의 실제 모델인 일본의 근대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츠는 1880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쉰 살이 지나서야 그림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된다. 1922년 42세에 24세였던 히데코와 결혼하고, 1932년 도시마구에 자택을 지어 1977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천국과 지옥> <붉은 수염> <카게무샤> 등 일본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야마자키 츠토무가 주인공 구마가이 모리아츠 역을 맡았다. 그의 아내 히데코 역은 <도쿄 타워> <내 어머니의 인생>으로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 <악인>으로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키키 키린이 맡았다. <모리의 정원>은 지난 2018년 9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의 유작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새, 고양이, 곤충들의 향연... '모리의 정원'에 빠져들다
▲ 영화 <모리의 정원>의 한 장면.
ⓒ 진진
자다 막 일어난 듯한 부스스한 머리카락, 입술을 완전히 덮어버린 하얀 수염. 일생의 절반 이상을 화가로 살아온 노인은 밤에는 '학교'라고 부르는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 외에 시간은 자신의 정원에서 보낸다.
반찬을 잘게 부수지 않으면 잘 씹지도 못할 정도로 치아 상태가 좋지 않다. 지팡이 두 개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않으면 제대로 걷기조차 불가능한 90대 노인. 그의 이름은 구마가이 모리카츠다. 그는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원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그에겐 정원 밖 세상의 일에 궁금증을 갖는 찰나의 시간조차 사치다.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30년이라는 세월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개미 녀석들은 왼쪽 두 번째 다리부터 움직이네요." (모리)
영화 속 모리는 자신의 모습을 주기적으로 기록하러온 사진작가 후지타(카세 료)에게 말한다. 후지타는 일본 역사에 남을 명망 높은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츠를 존경한다. 그는 모리의 노년기 모습 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생각의 흐름조차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들을 기록해왔다. 모리처럼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자세를 숙여 개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지만 모리가 봤던 것을 쉽게 볼 순 없다. 후지타는 아직 모리처럼 정원을 즐기기에는 역부족이다.
모리에게 있어 정원은 화가로서 영감을 찾아가는 원동력이다. 강렬한 햇볕이 정원을 비추면 하루가 시작된다. 그 햇볕이 정원을 비추는 것이 멈출 때 그의 하루도 마무리된다. 모리는 매일 같이 모닥불을 피우며 그날의 버려야할 생각들도 함께 태운다. 그런 모리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그의 정원에 내리쬐는 햇볕을 가로막을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이다. 모리를 존경하는 일본 시민들은 급기야 아파트 설립 반대 시위를 하고 공사 감독관이 모리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아파트가 세워지면 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정원에는 많은 나무와 벌레가 살고 있어요." (히데코)
모리의 정원 입구에 세워진 시위 간판을 철거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감독관에게 모리의 아내 히데코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30년간 이어온 남편의 유일한 삶의 즐거움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차분하게 감독관을 설득해보지만 먹힐 리 없다.
'MSG↓... 영상미↑' 싱거운 듯 담백한 영화의 맛
▲ 영화 <모리의 정원>의 한 장면.
ⓒ 진진
영화 속 모리의 곤충 관찰 장면은 마치 화면이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 모리는 한쪽 뺨을 바닥에 완전히 밀착하고 조금의 미동도 허락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마치 모리의 눈이라도 된 듯, 개미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춘다. 마치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잠시 후에는 장수풍뎅이를 비롯해 헤엄치는 물고기의 모습이 클로즈업 돼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모리의 정원>은 제목 그대로 관객들에게 '모리의 정원'을 들여다보는 경험을 안겨준다. 기승전결의 스토리라인은 있지만 스펙터클한 에피소드는 없다. 하지만 그게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특히 마치 곤충의 움직임에 맞춰 만들어진 듯한 배경음악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카메라 앵글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클로즈업이 연속으로 등장하지만 눈의 피로도가 낮다. 또 두 사람 이상 등장하는 장면에도 뭔가 특별함이 있다. 모리와 대립하는 감독관이 조금씩 모리에게 설득당할 때마다 화면의 좌우 비율이 달라지는데, 은근한 재미를 준다.
한편 영화는 오는 26일 개봉한다.
한 줄 평 : 조미료 없이 천연재료로만 만들어진 '건강영화'
별 점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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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리의 정원> 관련 정보
제목: 모리의 정원
영제: Mori, The Artist's Habitat
감독: 오키타 슈이치
주연: 야마자키 츠토무, 키키 키린, 카세 료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99분
수입/배급: (주)영화사 진진
개봉일: 2020년 3월 26일
관람등급 : 전체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