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악신과의 거래
어둠은 가장 순수한 빛 속에서 잉태되는 법이다. 때로는 가장 순결한 의지가 가장 깊은 나락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도 한다. 20여 년 전, 대한민국 의과대학의 낡은 강의실에서 시작된 두 젊은이의 꿈이 그랬다. 정재혁과 손영훈. 둘은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재혁은 불꽃같은 진취적인 성격과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과감함으로 끓어 넘치는 야심을 감추지 못했고, 손영훈은 늘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관조하고 사색하는 신중함과 또래를 압도하는 해박한 지식으로 재혁의 격정적인 불꽃을 지탱하는 바위와 같았다. 처음부터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질적인 두 사람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꿈'이었다.
"이봐, 손영훈! 너도 솔직히 한국 제약 시장이 너무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기업들이 독점한 시장에서 환자들은 제대로 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정재혁, 제약 시장은 돈벌이 이전에 생명과 직결되는 곳이야. 혁신도 중요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감이 선행되어야 해."
"책임감은 돈을 벌어야 따르는 거지! 제대로 된 투자 없이는 새로운 약도 없고, 새로운 연구도 없어! 우리가 들어가서 판을 흔들어야 해. 돈과 생명, 둘 다 잡을 수 있는 약을 만들자고!"
재혁의 뜨거운 야망에 영훈의 차분한 이성이 균형추를 달았다. 그러나 결국, 재혁의 열정이 영훈의 신중함을 압도했다. 그들의 꿈은 '선우(善友) 제약'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좋은 벗, 착한 친구"라는 뜻을 담은 이 이름은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되고,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착한 친구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그들의 순수한 맹세이자, 굳건한 우정의 증표였다.
그리고 그 맹세의 정점에 **'세레니움(Serenium)'**이 있었다. 현대인의 고질적인 문제인 불안과 우울증, 무기력감을 해결할 혁신적인 항불안제이자 경증 우울증 치료제. 기존의 정신과 약물들이 유발하는 부작용, 즉 졸림이나 인지 능력 저하, 무기력감 등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뛰어난 정신 안정 효과를 보여주는 '기적의 약'으로 설계되었다.
재혁은 세레니움이 만성 스트레스와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는 현대 사회의 병든 영혼을 구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영훈은 그 약의 안전성과 효능을 입증하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세레니움은 빠르게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중소기업청의 파격적인 지원과 표창이 쏟아졌고, 그들의 작은 스타트업은 '국민 정신 건강의 미래'라는 찬사 속에서 빠르게 성장해 갔다. 수많은 환자들이 세레니움을 통해 '잃어버린 일상'과 '평온한 마음'을 되찾았다고 간증했다. "행복을 주는 약"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곧 어둠을 불러왔다. 대한민국의 제약 시장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몇몇 거대 기업들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그들의 단합된 견제는 잔인하고 치밀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아귀가 선우 제약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언론을 통한 근거 없는 기사들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밤사이 대형 포털 사이트에는 '세레니움 부작용 사망 사건', '선우 제약의 숨겨진 비리',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세레니움의 위험성' 따위의 헤드라인이 도배되었다. 댓글 부대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퍼뜨렸고, 심지어는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들이 '세레니움 부작용 피해자 모임'을 자처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약 때문에 밤마다 환청이 들려요! 제 딸은 이 약 먹고 사람이 이상해졌어요! 선우 제약은 이 악마 같은 약을 당장 회수하라!"
핏발 선 눈으로 카메라 앞에서 울부짖는 '가짜 피해자들'의 모습은 여론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았다. 선우 제약 측에서 아무리 "사실이 아니다, 조작된 내용이다"라고 해명 기사를 내보내고 법적 대응을 해도 소용없었다. 작은 스타트업의 목소리는 거대 언론의 합창에 묻혀버렸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합작하여 진실을 짓밟고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모습은 민주 사회의 추악한 이면이었다. 이미 국민들의 뇌리에는 '세레니움 = 위험한 약'이라는 공식이 박혔고, 불신과 공포는 빠르게 번져나갔다.
하루아침에 그들이 그토록 신뢰했던 '세레니움'은 '독약'으로, '선우 제약'은 '돈벌이에 눈먼 사기꾼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매출은 급감했고, 회사는 빚더미에 앉았다. 직원들은 불안에 떨며 하나둘 회사를 떠나갔다. 그들의 명예는 실추되었고, 꿈은 산산조각 났다.
재혁과 영훈은 말 그대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자신이 만든 약이 오히려 사회적 흉기가 되었다는 자괴감, 밤낮없이 거짓과 싸워야 하는 극심한 스트레스, 그리고 매일 쌓여가는 빚 독촉에 시달리며, 세레니움을 개발했던 두 창립자는 역설적으로 가장 심각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빠져들었다. 수면제 없이는 단 한순간도 잠들 수 없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저 절망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녕 정신약을 만드는 회사의 대표들이 정신병에 걸린 기막힌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선우'라는 이름이 너무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거짓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것을 잃은 채,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렀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삶의 마지막 장소로 정한 곳은 일본의 유명한 '자살 숲', 아오키가하라(青木ヶ原) 주카이(樹海)였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모든 정보가 손안에 들어오던 시대가 아니었다. 20여 년 전, 지도 한 장과 작은 일본어 회화 책 하나에 의존해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본을 당일치기로 여행하듯 가볍게 다녀올 수 있던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고된 여정이었다.
일단 일본에 도착했지만, 목적지인 주카이 숲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결국 주카이 숲이 아니어도 일본의 산은 깊고 울창하다는 이야기에 희망 아닌 희망을 걸고, 일단 발길이 이끄는 대로 산맥을 찾아 이동했다. 돗토리 지역에 도착한 둘은 인적 드문 다이센(大山)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1,729미터의 이 산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영산이자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공부만 파고들었던 두 젊은이에게 산행의 기본 장비 따위는 있을 리 없었다. 험한 산을 오르기는커녕 등산 경험조차 전무했다. 가파른 비탈과 울퉁불퉁한 바위길에 몸은 금세 지쳐갔다. 설상가상으로 산속의 밤은 빠르게 찾아들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맹렬히 그들을 삼켰다. 얼마나 올랐는지도 알 수 없는 깊은 산속, 둘은 짧은 대화 속에서 희미하게 불타는 무언가를 공유했다.
"재혁아, 이곳이 우리가 마지막을 맞이할 곳인 것 같아."
"그래, 영훈아.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에…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이곳의 어둠이 우리를 삼키면… 모든 게 끝나겠지?"
절망의 끝에서 평온을 찾으려는 듯, 그들은 준비해 온 등산용 로프를 근처의 굵은 나무에 단단히 맸다. 재혁이 로프의 매듭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정적을 가르고 멀리서부터 숲의 심장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멀리 깊은 어둠 속에서, 점점이 떠다니는 작은 횃불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수십 개의 횃불이 마치 긴 뱀처럼 일렬로 움직이며 숲의 정적을 뚫고 다가오고 있었다. 불빛 사이로 언뜻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이한 표식 같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전통적인 하의만 입은 그들의 모습은 마치 고대 의식의 행렬 같았다. 스멀스멀 기어가는 뱀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행렬에, 재혁과 영훈은 숨을 죽인 채 몸을 숨겼다. 얼어붙은 몸만큼이나 심장 박동도 멈춘 듯했다.
그 행렬 속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눈에 띄었다. 딱 세 명만이 일반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들의 손은 밧줄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무리에게 끌려가듯 강제로 이동하고 있었다.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 그들의 얼굴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체념과 죽음에 대한 극한의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비록 멀리 서지만, 그 공포가 숲의 공기를 타고 이들에게까지 전이되는 듯했다.
재혁과 영훈은 서로 마주 보았다. 재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술만 달싹이며 영훈에게 속삭였다.
"저 행렬, 심상치 않아 보여. 죽음을 맞이하러 온 우리 눈에만 보이는 환각일까?"
영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를 넘어선 미스터리한 흥분감이 비쳤다.
"환각이라기엔 너무 생생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원래의 목적을 잠시 잊은 채, 후회와 미스터리한 호기심이 그들을 지배했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깊은 숲 속, 죽음을 향해 가던 그들의 발길은 이제 미지의 현장으로 향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아주 깊은 산속에 자리한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일본식 사원이었다. 세월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지는 사원은 마치 숲의 일부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돌계단과 석등에는 이끼가 두터운 카펫처럼 깔려 있었고, 낡은 목조 건물은 부식되어 곳곳이 주저앉아 있었다. 사원 전체에서는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섬뜩한 죽음의 기운이 풍겨왔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어둠을 내뿜는 사원 안에서,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공포가 그들을 짓눌렀다. 숲의 음산한 기운이 사원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 행렬의 사람들은 사원 앞 너른 마당에 무릎을 꿇고 사원을 응시했다. 정적 속에서 횃불만 흔들릴 뿐, 누구 하나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수십 개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공포의 형상을 만들었다. 숲의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인 듯, 그들의 귀에는 오직 자신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곧, 사원 안쪽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횃불 빛을 받으며 천천히, 그러나 압도적인 위엄을 풍기며 입구로 걸어 나왔다. 일본 전통 의상을 완벽하게 갖춘 늙은 남자였다. 70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풍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장했고, 허리는 조금도 굽지 않았다. 오직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과 약간의 검버섯만이 그의 세월을 말해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주변을 압도하는 것을 넘어, 보는 이의 숨통을 조이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이었다. 모두가 숨죽였다. 숲 속 작은 움직임조차 감히 허락되지 않는 듯,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재혁과 영훈은 직감했다. '저 사원에 있는 신의 대변인일까?' 그의 등장과 함께 벌어지는 이 강렬한 떨림과 숨 막히는 느낌은 그들의 확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늙은 남자가 손을 뻗어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뒤편 어두운 곳에서 세련된 정장 차림의 30대 사업가 같은 남성이 차분히 걸어 나와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신의 대변인은 무릎 꿇은 사업가의 등 뒤로 다가가 양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치 그에게 어떤 기운을 불어넣어 주듯, 혹은 그의 영혼을 확인하듯. 그리고는 다시 손짓으로 사원 안으로 무언가를 들여보내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업가가 나타났던 어둠의 반대편에서, 아까 보았던 평상복의 남녀 세 명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여전히 손이 결박된 채였고, 상의를 탈의한 채 근육질의 두 사내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사원 입구 앞에 세워졌다. 극도의 공포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도 그 절규를 전이시켰다.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고 텅 비어 있었다. 입구 앞의 남녀 세 사람, 그 뒤 무릎 꿇은 사업가, 그리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신의 대변인. 이 기묘한 배열 속에서 정적만이 흘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곧 벌어질 비극을 예감하는 듯한 불길한 기운만이 맴돌았다.
이윽고, 그 남녀 세 사람은 사원 입구 안쪽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강제로 끌려들어 갔다. 신의 대변인은 눈을 감은 채 고대 주문 같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어두운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재혁과 영훈에게는 공포와 함께 미스터리한 의식에 대한 섬뜩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들의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던 현실적인 절망감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초현실적인 공포 앞에 잠시 빛을 잃었다.
사원 안으로 세 남녀가 들어간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얕은 비명과 처절한 신음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 소리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재혁과 영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둘은 경악에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 의문,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였다. 사원 입구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색 섬광. 거대한, 마치 피로 물든 듯한 붉은 눈 한 쌍이 입구의 3분의 1을 가득 채우며 이쪽을 꿰뚫어 보았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감에 둘은 놀라 하마터면 뒤로 넘어지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이 전신을 감쌌다. 그것은 생명체의 눈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섬뜩한 존재였다.
이후, 신의 대변인이 무릎 꿇었던 사업가를 일으켜 세우고 그를 안아주었다. 사업가는 몇 번이고 허리 숙여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라는 큰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공포는 없었고, 득의양양한 기쁨만이 가득했다. 가보라는 손짓을 하는 신의 대변인의 지시에 따라, 윗옷을 벗은 두 사내가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 사내들의 목 뒤에는 검붉은 문신, 혹은 기이한 문양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지금 윗옷을 입지 않은 모든 사내들의 목 뒤에는 같은 문양이 있었다. 몸은 탄탄한 근육질에 다부진 얼굴들. 재혁은 '만약 훔쳐보다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다'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고, 영훈에게 최대한 몸을 낮추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 모든 상황이 죽음을 코앞에 둔 자들의 마지막 경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게 그들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사원으로 들어갔던 검은 문양을 가진 사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방금 사원으로 들어갔던 세 남녀가 축 늘어진 채 들려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쇼크사한 듯했다. 표정은 정상적이지 못했고, 눈은 실핏줄이 터진 채 하얗게 떠 있었다. 생명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시신은 조심스럽게 마당 한편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것을 본 영훈이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콰직!"
작은 소리가 어둠 속에서 거대하게 울렸다. 재혁은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목 뒤에 검은 문양을 한 사내들이 번개처럼 달려와 그들 앞에 섰다. 그들의 눈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짐승처럼 번득였다.
근육질의 사내들에게 거칠게 붙잡힌 재혁과 영훈은 끌려가듯 사원 마당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딱딱한 돌바닥에 무릎이 찧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내들은 그들의 어깨를 억누르며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수십 개의 횃불이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그들은 꼼짝없이 앉은 채 숨을 헐떡였다. 그 순간, 신의 대변인으로 보이는 늙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와 그들 앞에 섰다.
재혁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죽음이 코앞이라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그의 이성은 오히려 섬광처럼 빛났다. 그는 늙은 사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국말로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는… 한국인입니다. 생을 마감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어차피 죽으러 온몸이니, 당신들이 지금 하는 이 행위, 이 제사…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재혁의 외침에 노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 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짧지만 강렬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눈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당돌함에 미묘한 흥미가 인 듯했다. 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의 검은 문양 사내들을 훑었다. 이내, 몸집이 가장 크고 목 뒤에 가장 선명한 문신이 박힌 사내에게 일본어로 짧게 지시를 내렸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더니 재혁과 영훈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의 조상이 한국 교포였던 건지, 어눌한 한국어로 신의 대변인의 말을 통역하기 시작했다.
"이분은 카미노 다이벤샤(神の代弁者), 즉 신의 대변인이시다. 그분께서 묻는다. 무슨 일로 이 깊은 곳까지 왔으며, 어찌하여 죽음을 입에 담느냐."
영훈은 공포에 질려 말조차 잇지 못하고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재혁은 달랐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강렬해졌다. 어차피 죽을 목숨, 숨겨봤자 무슨 소용이랴.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망해가는 회사, 거대 기업의 횡포, 그리고 죽음까지 결심하게 된 모든 과정. 그 속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한 줄기 희망을 찾아 헤매는 자의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카미노 다이벤샤는 재혁의 이야기를 모두 통역으로 들은 뒤, 깊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인간미라기보다는 거대한 덫을 놓는 포식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의 단호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통역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우리는… 사람을 바쳐 재앙을 막고, 신의 축복을 얻는다."
카미노 다이벤샤는 설명을 이어갔다. 일본에는 여러 신들이 있는데, 이 신들은 항상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했다. 그것이 사람이든, 곡식이든, 음식이든, 술이든… 신들마다 다르다고. 그리고 이곳 사원에 모셔진 신은 바로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 폭풍과 재난의 신이자, 동시에 막대한 힘과 '출세'를 보장하는 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노하여 쓰나미와 지진, 역병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재앙을 일본 전역에 몰고 온다고 덧붙였다.
"이 의식은 고대 야요이-고훈 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일족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전통이다. 과거에는 황실의 대신들과 총리도, 수많은 고위 간부들도 이곳을 찾아 스사노오노미코토께 제사를 올렸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축복을 구했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미신으로 치부되어 찾는 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눈앞의 과학과 논리에만 집착하며 신의 존재를 잊었어. 그리고 신께서는 인간의 그 오만에 분노하셨다. 너희도 기억할 테지? 그 누구나 아는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그것이 바로 신의 분노였다."
카미노 다이벤샤는 재혁과 영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서… 이 신을 모시는 우리 일족은 방법을 바꾸었다. 스사노오노미코토의 노여움을 달래고, 그의 막대한 축복과 행운을 얻기 위해. 우리는 사람을 바치는 방식을 택했다. 신의 축복이 필요한 기업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자들이 직접 제물을 바치도록. 그리고 신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들의 기업은 거대하게 성장했고, 그들 역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지."
재혁은 손가락으로 죽은 세 사람을 가리켰다. 그의 눈동자에 욕망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이미 모든 절망을 맛본 그의 정신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비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간절한 답처럼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저 사람들이… 제물인가요? 그럼 아까 그 사업가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저들을 바친 겁니까? 정말… 그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까?"
카미노 다이벤샤는 옅게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저것은 히토미고쿠(人身御供), 신을 위한 인간 공물이다. 우리 신은 약속을 지키신다. 보아라, 저들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재혁의 내면에서 억눌렸던 무언가가 들끓었다. 절망의 나락에서 깨어나는 거대한 괴물처럼, 그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이런 방법이… 이런 방법이 있었다면…! 우리 선우 제약도…!' 영훈은 재빨리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만류하려 했다. 그의 눈에는 재혁을 덮치려는 광기와 파멸이 보였다.
"재혁아,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야! 정신 차려! 이건 살인이라고!"
그러나 재혁은 이미 욕망의 파도에 휩쓸린 듯했다. 그는 영훈의 손을 뿌리치고 카미노 다이벤샤를 똑바로 응시하며 절규하듯 거래를 제안했다. 그의 눈은 불길처럼 이글거렸고, 목소리에는 삶의 마지막 기회를 붙잡으려는 자의 처절함과 광적인 결단이 담겨 있었다.
"카미노 다이벤샤! 듣고 계십니까! 제게… 저 신의 힘을 얻을 기회를 주십시오! 망가진 모든 것을 되돌릴 힘을 보장해 주신다면! 제 출세만 보장해 주신다면! 저 신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저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저는 기꺼이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저를… 이 위대한 신의… 가장 충실한 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재혁의 외침은 깊은 산속의 고요를 깨고 멀리 퍼져나갔다. 그 속에는 파멸과도 같은 욕망이 가득했고, 이제 그는 되돌릴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영훈은 절망에 질린 채, 이미 다른 길로 접어든 친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우정을 삼켜버린 배신감과, 앞으로 다가올 불길한 운명에 대한 비명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