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얽힌 사슬, 어둠의 심연으로

11. 숙명(宿命)의 굴레

by 끄적쟁이

11. 숙명(宿命)의 굴레


선우 그룹 대표실의 공기는 정지된 시간처럼 무거웠다. 최고급 샴페인 잔을 든 손영훈, 그리고 그 맞은편 가죽 소파에 기댄 채 먼 곳을 응시하던 정재혁. 둘의 눈빛은 아득한 과거의 산속 사원에 묶여 있었다. 횃불의 희미한 불빛, 스사노오노미코토를 부르는 기이한 주문, 그리고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던 핏빛 붉은 눈동자. 모든 것이 생생한 악몽처럼 두 사람의 뇌리를 강타했다. 시간은 20여 년을 거슬러 그 밤에 머물러 있었고, 그들은 끝없이 추락하던 삶의 절벽 끝에서 붙잡았던, 그러나 너무나도 위험했던 악마적 연대를 공유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도시의 불빛이 샴페인 잔에 부딪혀 부서졌다. 그 찬란함은 이들이 등진 어둠과는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영훈의 젖은 눈빛이 과거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실의 재혁에게로 향했다. 재혁 역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훈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 동안 잠식되었던 기억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온 듯, 그의 눈은 깊은 수렁 같았다.


"그래, 영훈아… 자네는, 그때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재혁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폭풍 전의 고요함 같은 위태로운 물음이 담겨 있었다. 영훈은 재혁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고요히 흘러가는 시간을 몸으로 느꼈다. 어둠의 산맥에서 시작된 비극적인 역사가 그의 눈꺼풀 뒤편으로 스쳐 지나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것을 던지고 얻어낸 지금의 부와 명예, 그리고 그 대가로 감내해야 하는 끔찍한 진실. 그의 뇌리에는 그 어떤 죄책감보다도 짙은 피로감이 먼저 밀려왔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영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 자네의 그 결정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풍족하게 살 수 있었겠나. 자네 탓을… 전혀 하지 않아."


영훈의 대답은 재혁의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중압감을 단번에 덜어냈다. 그의 눈동자에 만족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스쳤다. 재혁은 물끄러미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단순한 친구를 향한 것이 아닌, 그들의 기묘한 유대를 확인하는 듯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이내 재혁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며 한 손으로 정장 바지를 잡고 무심하게 들어 올렸다. 섬세하게 다림질된 최고급 원단 아래로 드러난 것은, 영훈의 심장을 발밑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정강이부터 발목까지, 그의 맨살은 기괴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살아있는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색을 띠며 마치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흡사 미라의 피부처럼 건조하고, 생기가 전혀 없었다.

영훈의 두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레졌다.


"재혁… 자네… 다리가… 대체 이게…!"


영훈의 목소리에는 경악과 함께 본능적인 공포가 스며 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듯 다시 재혁의 다리를 응시했다. 꿈일까? 환각일까? 하지만 끔찍한 현실은 그의 시야를 흐릿하게 흔들었다. 재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는 영혼 없는 눈빛으로 창밖의 야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르신이… 다녀가셨어."


영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순간 피 한 방울 없는 백색이 감돌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한 번 더 확인하듯 되물었다.


"카미노 다이벤샤 님이…?"


재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대표실 문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두 명의 검은 사내에게로 향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한 경호원이자 동시에 감시자였다.


"저 **키노 카게(影)**들… 녀석들은 우리의 손발이 되어주지만… 동시에 감시자이기도 해. 모를 턱이 없지. 이번 정신병원 원장 관련 뉴스가 나오기 전, 이미 예견이라도 한 듯… 어르신께서 직접 찾아오셨어."


재혁의 말에 영훈은 싸늘한 냉기 속에서 비틀거렸다. 이번 일(선우 정신병원 원장의 '꼬리 자르기' 사건)이 완벽하게 정리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로 인해 어르신의 '불편한' 방문을 재혁이 대신 감내했다는 것에 대한 복합적인 두려움과 죄책감이 그를 덮쳤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 불찰입니다."


재혁은 그런 영훈의 반응을 예상한 듯 시선을 거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그 산에서… 카미노 다이벤샤 님에게서 신의 능력과 힘을 얻었지. 그때… 키노 카게들도 우리에게 주셨고. 기억하나?"


재혁의 말은 영훈의 내면에 깊이 파묻혀 있던 끔찍한 기억을 다시 한번 끄집어냈다. 그의 눈앞에는 20년 전,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악마와의 거래 현장이 선연하게 펼쳐졌다.


[20년 전, 다이센 산 신전]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재혁과 영훈은 거대한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 사원의 음습한 기운 속에 갇혀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 속에서도, 재혁은 불타는 욕망으로 카미노 다이벤샤에게 맹세했다. 신에게 부족함 없는 제물을 바치고,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충실한 신도가 되겠다고. 영훈은 경악에 질려 친구를 만류했지만, 재혁의 눈빛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카미노 다이벤샤는 재혁의 간절한 절규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마른 손이 허공을 휘젓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키노 가게들이 일제히 의문의 짐승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 울음소리는 숲의 모든 생명체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공기는 일순간 정지하는 듯했다. 노인의 지시에 따라, 키노 카게들이 재혁과 영훈을 일으켜 세워 신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신전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둡고, 넓었다.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검은 아지랑이였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공간을 유영했다. 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코를 찌르는 역한 피비린내가 뒤섞여 후각을 마비시켰다. 재혁과 영훈은 거부감에 구토를 참으려 애썼지만, 본능적인 공포 앞에서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검은 아지랑이 속에서, 불현듯 수천, 수만 개의 붉은 눈동자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눈동자들은 재혁과 영훈의 눈에, 심장에, 영혼에 직접적으로 박히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사원 전체가 살아있는 거대한 괴물의 내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일제히 울려 퍼졌다.


“갈망하라… 더 갈망하라…”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오만함은 파멸로… 복종은 힘으로…”


수백 년, 수천 년의 고통과 욕망, 그리고 파괴의 염원이 응축된 듯한 목소리들이 그들의 뇌를 직접 파고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까지 흔드는 듯한 강력한 주문이었다.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그들은 미지의 존재에게 속절없이 휘둘렸다.


이윽고, 검은 아지랑이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신전의 깊숙한 곳에서, 카미노 다이벤샤가 신상처럼 고요히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은빛 단도와 검은 빛깔의 술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노인은 재혁과 영훈을 향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는… 스사노오노미코토께 바쳐진 첫 제물이 될 것이다. 기꺼이, 이 축복을 받아들여라."


카미노 다이벤샤는 은빛 단도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검은 술잔 하나에 흘러나오는 피를 받았다. 비릿한 쇠 냄새가 신전 가득 퍼져나갔다. 이어서 그는 그 피를 신전 중앙의 거대한 제단에 붓고, 재차 자신의 피를 다른 술잔에 받아 재혁에게 내밀었다. 피로 물든 잔은 기묘한 영롱함으로 빛났다.


"마셔라. 스사노오노미코토님의 권능이 너희의 피와 살이 될지니."


재혁은 본능적으로 잔을 거부하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손을 움직였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 들었다. 뜨겁고 역한 피가 그의 입술을 스쳤고, 강렬한 고통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피를 넘어선, 다른 차원의 액체였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뜨거운 독이 퍼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재혁은 비명을 삼키며 몸부림쳤다. 그의 눈앞에는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이 거친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고,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려 들었다.


영훈 역시 재혁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저항이 일었지만, 거대한 악신의 권능 앞에서는 그 어떤 저항도 무의미했다. 그들은 쓰러지듯 정신을 잃었고, 신전은 다시 고요한 어둠에 잠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재혁과 영훈은 여전히 신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몸속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끊어졌던 신경망이 다시 연결되고, 닫혔던 오감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능력과 인지를 부여받았다. 재혁에게는 어떤 것을 바라보면 그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의 능력, 그리고 그를 현실로 만드는 추진의 권능이, 영훈에게는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조종할 수 있는 민감한 감응의 권능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능력들은 아직 불완전하고 미성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몸속 깊은 곳에 스사노오노미코토의 피가 흐른다는 끔찍한 진실이 새겨져 있었다.


영훈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떨림은 단순히 그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서 악신과 거래하여 얻어낸 ‘출세’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움켜쥐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가 뒤섞인, 복잡하고 이질적인 감정이었다. 자신의 변모된 모습을 부정하려는 듯, 그의 미간은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여전히 순수한 마음 한 조각을 움켜쥐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 영훈의 복잡한 감정선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혁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냉철하고 단호한 어조는 예전의 친구에게는 없던 잔혹함을 담고 있었다.


"친구인 자네에게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 하지."


재혁의 눈빛은 영훈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영훈을 응시했다.


"정신병원 원장의 '꼬리 자르기'는 다행히 성공했지만… 아직 우리가 제거해야 할 암덩이가 남아있어. 강민성 형사,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꼬마 도사나 무녀 같은 부류의 인간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너무 깊이 파헤치고 있어. 계속 우리를 문제 삼을 게 분명해. 게다가 이 일은 자네의 책임도 있지 않은가?"


재혁의 목소리 끝에는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은 지시가 숨어 있었다.


"문제 일으키지 않게… 미리 정리 좀 해주길 바라네. 깔끔하게."


그것은 친구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반 협박'이자 '지시'와 다름없었다. 영훈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재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거대한 그룹의 서열과 권력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선우 그룹의 대표이사 정재혁, 그리고 그 계열사의 한 병원 이사장에 불과한 손영훈. 친구라는 호칭은 이제 빛바랜 과거의 유물일 뿐이었다.


사실 영훈은 재혁의 기이하고 빠른 성장을 늘 두려워하고 있었다. 악신과의 거래 이후, 재혁은 놀라운 속도로 선우 그룹을 확장했다. 그들이 고통받았던 대기업들의 주요 인사들은 차례로 ‘의문사’하거나 ‘비리’에 연루되어 몰락했고, 그 자리는 순식간에 재혁이 심은 인물들로 채워졌다.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늘 키노 카게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심지어 카미노 다이벤샤를 통해 흘러들어온 일본의 검은 자금은 언론을 장악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데 사용되었다. 진실은 철저히 묻히고, 거짓은 포장되어 세상에 퍼졌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거대한 권력'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영훈은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는 듯한 재혁의 모습에 깊은 공포와 환멸을 느꼈다. '선우 그룹'을 만들 때의 처음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검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는 재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본사의 주요 보직을 거절하고, 일부러 한 계열사의 정신병원 이사장으로 자진해서 내려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재혁은 영훈의 이런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듯이. 재혁은 영훈이 아무리 피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도록, 가장 끔찍하고 더러운 역할인 '인신공희를 위한 인물 공급책'을 일부러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재혁은 영훈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네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너 또한 나와 똑같이 악신과 거래하여 변해버린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의 손에는 이미 피가 묻어있다는 것을.'


영훈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땀으로 흥건했지만, 어떤 변명도, 어떤 거부의 몸짓도 나오지 않았다. 재혁의 눈빛 속에서 자신의 비겁함과 무력함을 동시에 보았다. 그는 이제 거대한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희생양인 동시에 공범이었다.


결국 영훈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뺨을 때리는 듯한 자괴감으로 떨렸다.


"… 알았네. 내 처리하도록 하지. 이번 일에는… 키노 그림자(카케)들 좀… 내가 좀 쓰겠네."


재혁은 그제야 비로소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성공을 확신하는 차가운 만족감만이 가득했다.


"그럼 믿겠네, 친구."


그러나 그 말에는 더 이상 우정의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뒤틀린 권력관계와 서로의 추악한 비밀을 움켜쥔 채, 같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두 공범자의 서늘한 거래만이 존재했다. 밤의 장막이 완전히 드리워진 선우 그룹 대표실 안, 둘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 또 다른 악마처럼 보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