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산신의 기척 (山神의 氣滌)
세상은 선우 그룹이 뿌린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고요히 숨을 죽였다. 언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했고, 선우 계열사의 제약, 의료기구 회사, 그 어떤 곳도 침묵을 깨지 않았다. 수색의 흔적조차 없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교활하게 '꼬리 자르기'를 감행했고, 대중의 관심은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강민성 형사는 알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태풍 전의 고요가 더 무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었다. 민성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아니, 민성의 아이들이 지닌 비범한 재능을 이제는 분명히 알아차렸을 터였다. 자신이야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한 몸이라지만, 아이들만은 아니었다. 그 순수하고 빛나는 영혼들이 탐욕스러운 어둠의 손아귀에 붙잡히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성은 지금, 무학산의 거친 등반로를 거침없이 오르고 있었다. 심장이 턱밑까지 차오르도록 숨을 헐떡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불안과 염려가 그의 심장을 옥죄어올 때마다, 그의 몸은 그를 해방시키려는 듯 더욱더 빠른 속도로 산을 내달렸다. 이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오직 산을 오르는 육체적 고통을 통해서만 잠시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등반은 단순히 목표를 향한 움직임이 아닌, 내면의 폭풍을 잠재우기 위한 고독한 의식이었다. 산 중턱을 지날 때마다 그의 몸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평범했던 오감은 이미 범인의 그것을 넘어섰고, 산속의 모든 기척과 생명력이 피부에 와닿는 듯했다. 불안정했지만 분명히 각성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만신 할머니 집은 작은 계곡 옆, 골짜기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민성이 마지막 봉우리를 지나갈 때쯤이었다. 그 봉우리는 이상하리만큼 나무 한 그루 없이 온통 돌로만 이루어진 황량한 곳이었다. 거대한 바위들이 제멋대로 솟아 있고, 앙상한 흙 사이로 부서진 돌조각들만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거친 바람이 돌 틈을 할퀴고 지나가며 쓸쓸한 울음을 토해냈다. 황량하지만 동시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그곳에 올라서면, 이제 곧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쳐 있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하지만 정상의 돌무더기에 발을 내딛는 순간, 민성은 흠칫하고 놀라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태껏 수없이 무학산을 오르내리면서 단 한 번도 다른 등산객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황량한 돌무더기 한가운데, 햇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웬 노인 한 분이 보였다.
그는 요즘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 바랜 흰색의 개량 한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단정치 못하게 희끗희끗한 흰머리는 마치 오랜 세월 산바람에 길들여진 듯 성긴 상투처럼 묶여 있었고, 얼굴은 오랜 햇빛에 그을린 듯 약간 검붉은 피부였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매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고 강렬한 호랑이 눈빛을 지니고 있었고, 그 위에 드리워진 두꺼운 눈썹은 산속 맹수의 위엄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구불구불한 곰방대(옛날 담뱃대)가 짧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흙으로 만든 작은 곰방대는 숯불에 데워진 탓인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에는… 민성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그 노인의 신발을 보고는 다시 한번 경악했다. 요즘 세상에, 짚신이라니!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이런 깊은 산에서, 마치 선사 시대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 노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민성의 마음속에는 경계심과 강렬한 호기심이 동시에 솟아났다.
민성이 그런 의아함과 동시에 170cm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키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氣韻)에 압도되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찰나였다. 먼 산을 응시하고 있던 노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민성을 향해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민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평온하고도 날카로웠다. 노인은 짐짓 허허 웃으며 민성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에 비해 맑고 또렷했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이런 곳에… 어쩐 일로 왔는가?"
민성은 노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저… 만신 할머니를 뵙고, 제 아이들을… 보러 왔습니다."
민성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친근한 듯 무심했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초월적인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아… 그 만신 아가…? 잘 지내고 있던데…?"
민성은 자신의 할머니뻘은 족히 되어 보이는 만신 할머니를 '아가'라고 부르는 노인의 말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 노인의 나이는 대체 몇이란 말인가. 하지만 노인은 민성의 당황한 기색을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 태연히 곰방대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 먼 산봉우리를 향했지만, 그의 말은 분명 민성과 그의 아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도 잘 있더군. 염동력을 쓰는 아이와… 무녀의 기운을 타고난 아이…. 흐음… 한 녀석은 재주가 제법이고, 한 녀석은… 때가 되면 더 큰 그릇이 될 테지. 흥미롭더군."
노인의 말은 마치 세상의 모든 생명을 내려다보는 듯한, 무심하고도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말투 속에서 민성은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노인은 단순히 이 산에 우연히 머무는 약초꾼이 아니었다.
"저… 실례지만, 어르신께서는… 대체 누구십니까?"
민성이 조심스럽게 묻자, 노인은 피식 웃었다. 그의 강렬한 눈매가 이번에는 민성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었다.
"나는 이 산 주인일세. 허허."
민성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산 주인'이라니, 농담일까? 하지만 노인의 아우라는 결코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노인의 코끝이 킁킁거리더니, 갑자기 민성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민성은 노인의 눈빛 속에서 섬뜩한 광채를 보았다.
"흐음… 자네에게서… 짐승 냄새가 나는구먼. 아주 오래된, 그리고 지독한… 잊었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냄새로군."
노인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아련한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옛날에… 고년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년 나를 얼마나 골탕 먹였는지, 허허. 매번 내 수염을 뽑아가겠다며 달려들고… 심심하면 호랑이 행세를 하며 날 놀려댔지. 그런데 말이야… 그 지독하고 달콤한 냄새가… 자네에게서 나는 걸 보니… 참으로 반갑구먼. 꽤나 오랜만일세, 이런 인연은."
노인은 민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마디가 굵고 투박했지만,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뿌리처럼 단단해 보였다.
"내 비록 늙어 볼품없으나… 옛 친구 같은 자네와 인사를 나누고 싶네. 악수나 한 번 하세."
민성은 묘한 전율 속에서 노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손아귀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악력이 뿜어져 나왔다. 민성은 저도 모르게 온 힘을 다해 노인의 악력에 저항했다. 그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고, 손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죽을힘을 다해 버텨냈지만, 노인의 힘은 전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짧지만 지독한 힘겨루기였다.
이내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힘을 풀었다. 민성의 손은 새빨갛게 부어올랐고, 주먹은 저절로 구겨졌다. 노인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번 대(代)에 힘이 나오려 하는가 보구나. 아니면… 필연인가? 재밌겠어…."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민성이 올라왔던 길로 유유히 내려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산 그 자체가 움직이는 듯 가볍고 유연했다. 민성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노인의 압도적인 힘에 놀라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니, 끔찍하게 부어올라 빨개진 손바닥과 구겨진 주먹이 그 짧은 순간의 힘겨루기가 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아차!' 하는 생각에 노인이 사라진 길을 향해 다급히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그는 숲의 정령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깊은 산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해는 산 너머로 기울고, 주황빛 노을이 숲을 붉게 물들였다. 석양이 다 지기 전, 민성은 간신히 만신 할머니의 초가집에 도착했다. "아빠!" 마당에서 놀고 있던 미나와 호연이 민성을 발견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 작은 체온이 민성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녹여주었다.
"우리 아빠 왔어!" "아빠, 나도 아빠 보고 싶었어요!"
아이들의 맑고 티 없는 미소와 순수한 재롱에 민성의 얼굴에도 비로소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할머니 역시 대문 앞에 서서 반갑게 민성을 맞았다.
"왔는가, 민성아. 힘들게 찾아왔을 텐데… 어서 들어오게."
짧지만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민성은 할머니와 함께 아이들을 안고 초가집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무학산에는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고, 초가집 안은 등불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이들은 민성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렸고, 민성은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아이들에게 자세하고 냉정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을 더 이상 보호막 안에 둘 수 없음을 직감했다. 지금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였다.
"너희도 뉴스나 신문 기사를 봤을 수도 있겠지만… 최근에 선우 그룹 관련해서 큰 사건이 있었지? 거기서 아빠가 연루된 일 때문에 선우 정신병원 원장은 잡혀서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그만큼 그들이 감추려 했던 진실이 커다란 덩어리라는 얘기지."
호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아빠, 이제 다 끝난 거예요? 그 불사신 같은 아저씨들은요?"
민성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아니, 끝나지 않았어. 너희들이 목격했던 그… 불사신 같은 아저씨들 있지? 그들이 누구인지, 얼마나 되는 조직인지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아.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만 할 수 있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선우 그룹은 보통 조직이 아니라는 거야. 자신들의 일이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고… 이제 곧 우리를 보복하기 위해 찾아올 거다."
민성은 미나와 호연의 눈을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 담겨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은 내가 주 타깃인 동시에, 너희들의 특별한 능력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거야. 미나, 너의 무녀로서의 힘은 그들이 간과할 수 없는 위험 요소로 판단할 거고, 호연, 너의 염동력 또한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이젠 우리 모두가 안전하지 않아. 이 초가집, 이 무학산도…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어. 이제 우리에겐 평범한 삶이란 없어.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라."
미나와 호연은 두려움에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내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듯 차분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닥쳐올 시련을 감당하기 위해 각자 단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각오가 조용히 자리 잡는 듯했다.
민성은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할머니… 아이들 잘 보살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할머니의 존재는 저희에게 큰 위안입니다."
할머니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 이 아이들은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잊을 만큼 내 늙은 혼을 쏙 빼놓는다네. 걱정 말게, 나도 이 아이들 덕에 사는 재미를 느끼고 있으니." 그녀의 깊은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민성은 심각한 얼굴로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할머니…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선우 그룹 놈들이 곧 알아챌 겁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잠시나마 다녔던 흔적이 남아 있으니… 빠르게 찾아올 것이 분명합니다."
민성의 말에 미나와 호연의 얼굴에 일순간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내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작은 얼굴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직감한 듯한 결의가 비쳤다.
이른 아침, 새벽안개가 무학산 봉우리들을 휘감고 있을 무렵. 동이 트기도 전에 미나는 할머니와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구름이 마치 하얀 머플러처럼 산의 머리에 걸려 있는 듯했다. 나무들 사이로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눅눅한 흙냄새와 새벽 공기의 서늘함이 온몸을 감쌌다. 미나는 낯선 산행에 당황하며 할머니를 따라 걷기 바빴지만, 할머니는 그런 미나를 힐끗 쳐다볼 뿐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노쇠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미나가 점차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올라야 할까 생각하며 지쳐갈 무렵이었다. 귓속으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직접 박히는 듯한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웬일인 거냐…?"
미나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짙은 안갯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동쪽 하늘에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옅은 주황빛 햇살이 안개를 가르자, 마치 무대 위 커튼이 걷히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가 걷히고 선명하게 드러난 그곳에는…
미나가 어젯밤 민성으로부터 들었던 바로 그 노인이 앉아 있었다. 햇살 아래 곰방대 담배를 물고 앉은 그의 모습은 마치 돌무더기 봉우리의 일부인 양 자연스러웠다. 희끗희끗한 긴 머리를 상투처럼 묶고, 강렬하고 예리한 호랑이 눈을 한 노인. 미나는 그 비현실적인 존재 앞에서 숨을 멈췄다. 할머니는 그 노인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노인, 즉 이 산의 '산신'은 자신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는 할머니와 두려움에 얼어붙은 미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인간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곳적부터 존재해 온 신의 무심하고도 냉철한 시선만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미나의 머릿속에 울렸다.
"저 아이가… 그 만신의 후계라는 것이냐? 흐음… 이제 겨우 씨앗을 틔웠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 깊은 산까지 찾아올 정도면… 제법 배짱은 있군."
할머니는 미나에게 말했다.
"산신 할아버님께 예를 갖추거라. 이 아이는 아직 장군님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그릇이 작습니다. 이 아이의 영적인 성장을 돕고… 신의 권능을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
산신은 미나를 향해 다시 한번 곰방대에서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신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통찰이 깃들어 있었다.
"장군신의 힘이라… 허허. 고약한 힘을 다루려면, 그에 걸맞은 그릇이 되어야 하는 법. 내 비록 한가하지만… 가르침을 줄 수는 있겠지. 한데… 그 대가는… 무엇으로 치를 참이냐?"
미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산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의 얼굴에 어린아이답지 않은 단단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산신을 향해 또렷하고 당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산신의 무심한 눈빛에 균열을 일으킬 만큼 강렬했다.
"저를 가르치시면… 산신께는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제 힘이… 제 그릇이 정말 커진다면… 그것이 산신께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그저 가르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탐낼 만한 가치를…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지닌 숙명을… 이 땅에 펼쳐 보일 기회를 주십시오."
미나의 당돌한 대답에 산신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 했다. 그의 오랜 삶 속에서도 이런 대답을 들은 것은 거의 처음이라는 듯, 흥미롭다는 듯한 빛이 그의 깊은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무심한 표정에 아주 찰나의 변화가 스쳐 갔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산 정상에 울려 퍼졌고, 산의 정령들이 그녀의 말을 듣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함께,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영적인 세계의 문턱에 서 있었다.
그 시각, 민성 또한 자신의 변화된 육체와 정신에 적응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우 그룹의 그림자, 그리고 그에 맞설 수 있는 힘.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악신과의 피 섞인 인연으로 얻게 된 권능들은 그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었고, 휴식을 요구하는 육체와는 별개로 오감은 더욱더 예리하게 벼려져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적합한 수련 장소를 찾아 명상에 잠기기 위해 움직였다.
전보다 훨씬 빨라진 발걸음으로 산속을 헤치던 민성은 어느 바위들 틈에 숨겨진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굴 입구는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이 민성을 이끌었다. 어둡고 좁은 그곳으로 그는 천천히 발을 딛고 들어섰다. 굴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이제 민성의 눈에는 희미한 빛마저 감지될 정도로 시력이 변해 있었다. 깊숙이 들어가자 굴이 점차 넓어지며 평평한 곳이 나타났다. 마치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동굴과도 같았다.
민성은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원래 뛰어난 무도인이었던 그에게 명상과 육체 조절은 익숙한 영역이었다.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동굴 안을 채웠고, 민성은 그 소리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의 몸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점차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변모해가고 있었다. 과거의 강민성은 이미 사라지고, 새로운 능력을 품은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내면의 싸움을 벌이며, 자신 안의 짐승과 인간의 경계에서 균형을 찾아 헤매었다.
한편, 민성과 미나가 각각 수련을 위해 떠난 동안, 호연은 혼자 초가집에 남아 있었다. 누나와 아빠의 모습에서 자신도 강해져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염동력을 연습했던 초가집 근처의 작은 계곡으로 향했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그곳에서 호연은 주머니에서 쇠구슬들을 꺼냈다. 한 손으로 작은 쇠구슬 하나를 공중에 띄우고 집중했다. 그 구슬은 이내 호연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허공을 유영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지함과 집중력이 어려 있었다.
호연은 연습했던 대로 쇠구슬들을 공중에 띄우고, 그의 몸을 축으로 삼아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쇠구슬들은 점점 속도를 더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막을 형성했고,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방패처럼 호연의 주변을 에워쌌다. 작은 몸으로 거대한 힘을 다루는 호연의 얼굴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어려 있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회전하는 쇠구슬 방어막은 불어오는 바람조차 막아내는 듯했다.
"자… 이번에는…!"
호연이 눈을 감고 온 신경을 모았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펼치자, 회전하던 쇠구슬들이 마치 폭발하듯 사방으로 맹렬하게 뻗어 나갔다. 숲의 나무들이 굉음과 함께 흔들렸고, 계곡물이 거세게 출렁였다. 쇠구슬들은 맹렬한 기세로 돌과 나무를 때렸고, 그 충격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호연이 다시 손을 가슴 앞에 모으자, 맹렬하게 뻗어 나갔던 모든 쇠구슬들이 거짓말처럼 호연의 손 앞으로 돌아와 마치 하나의 생명체인 것처럼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작은 쇠구슬들은 거대한 은빛 구슬로 변모하며 호연의 손 안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호연의 작은 두 손 안에서 거대한 힘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일깨워나가고 있었다. 어둠의 세력이 다가옴에 따라, 그 안에서 새로운 힘이 싹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