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임박한 그림자 (臨迫한 影)
무학산 초가집의 작은 방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밤새 켜두었던 등불의 심지가 길어져 깜빡이자, 만신 할머니는 새벽이 가까워 온 것을 직감했다. 뻐꾸기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창문 너머로는 푸릇한 빛이 세상의 윤곽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했다. 희미한 여명이 동트는 산을 깨우는 동안, 할머니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찬 새벽 공기가 마른 몸을 스쳐 지나갔지만, 할머니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툇마루에 앉아 깊은 시선으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하늘은 이제 막 깨어나는 산봉우리와 만나 신비로운 색감을 자아냈다. 노인의 주름진 입술 사이에서 나직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험한 것들이… 오려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늙었지만 흐릿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영적인 세계와 교감하며 단련된 예감이, 곧 닥쳐올 폭풍을 그녀의 마음에 선명히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들이 보내는 섬뜩한 경고였다.
초가집 뒤편, 험준한 산세에 자리한 너럭바위 위에서 민성은 호연에게 선우 그룹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냉혹한 생존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민성은 호연의 키를 훌쩍 넘는 바위틈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연아, 저기 보여? 저기 틈새로 몸을 숨기면 너는 안전해. 하지만 네 시야에는 저 아래에서 접근하는 놈들의 움직임이 모두 들어올 거야. 공격 방식, 위치 선정, 그리고 놈들의 눈을 속이는 법까지. 이 모든 걸 네 머릿속에 완벽하게 각인시켜야 해."
호연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땀을 훔치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그냥 쇠구슬로 다 처치하면 안 돼요? 저는 염동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에게는 숨고 지키는 전술보다는 당장 눈앞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민성은 단호했다.
"그놈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교활하고 위험한 존재들이야. 너희 불사신 같은 **그림자 (카노 카게, 影)**들에게 잡히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그때는 어떤 염동력도 소용없어. 절대로 정면 대결은 안 돼. 이건 생존이다. 이놈아."
민성은 이미 며칠 전부터 무학산 곳곳을 탐방하며, 호연에게 가장 적합한 지형을 파악해 두었다. 어린 호연은 적을 명확히 바라볼 수 있지만, 아래에서는 그의 작은 몸집이 완벽히 가려지는 그런 곳. 그는 호연에게 땀밤(달콤한 찐 밤)을 하나 건네며 달랬다.
"군소리 말고, 지금부터 아빠가 알려주는 곳들을 잘 기억해 둬. 이건 단순한 훈련이 아니야. 너희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민성은 딱밤을 먹으며 불퉁하게 투덜거리는 호연의 엉덩이를 가볍게 발로 툭 차며 재촉했다. 두 사람은 반나절 이상 산등성이를 돌아다녔다. 숲의 모든 바위, 나무, 계곡물이 그들의 잠재적인 아군이 될 수 있도록 호연의 머릿속에 지형지물을 각인시켰다. 작은 소년에게는 고되고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민성은 단 한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호연을 지도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한 절박함이 그의 눈 속에 보였다.
해 질 녘, 민성은 호연을 초가집 근처 계곡으로 데려갔다.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에 걸터앉아 민성은 작은 돌멩이들을 하나씩 던져 올렸다. 호연은 그의 염동력으로 공중에 띄운 쇠구슬들을 민성이 던진 돌멩이에 정확히 맞춰 떨어뜨리는 연습을 했다. 목표는 정확한 조준력. 쇠구슬이 돌멩이를 때릴 때마다 '탁!' 하는 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백발백중의 실력이 될 때까지,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훈련은 계속되었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넘어가고, 숲은 깊은 어둠에 잠겼다. 민성은 마침내 호연을 초가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미나 누나랑 할머니 옆에 붙어 있거라. 아빠는 잠시 숲을 살피고 올게."
호연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한 후, 민성은 다시금 어두운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둠은 민성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무기였다. 그는 자신의 시력이 어둠에 완전히 적응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숲의 가장 깊은 곳, 달빛조차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비추는 곳에서 민성은 눈을 감고 깊이 집중했다. 그의 온 감각이 숲의 미세한 떨림과 생명의 소리에 곤두섰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그의 몸속에서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끓어올랐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그의 두 눈에는 섬뜩한 푸른 안광(眼光)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어둠은 그에게 한낮의 빛과 다름없었다.
민성은 거대한 참나무 가지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발소리 하나 없이 나무 가지들을 밟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그의 몸은 더욱 빠르고, 더욱 은밀하게 움직였다. 나무 꼭대기에서 숲을 한 바퀴 넓게 정찰했다. 숲의 모든 움직임, 모든 기척이 그의 감각에 포착되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전과 다름없이 고요했다. 정찰을 마친 민성은 다시 만신 할머니 집 근처로 돌아왔다.
초가집 마당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민성에게 의문이 들었다. 선우 그룹이 침묵한 지 벌써 3일째. 분명 이 좁은 대한민국 땅에서, 그들이 이 깊은 산속까지 자신들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조용했다. 폭풍 전의 고요함은 오히려 민성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그때,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귀견들이 꼬리를 흔들며 민성을 향해 반갑게 달려왔다. 그 사랑스러운 녀석들을 보며 민성은 피식 웃었다.
"어서 들어가자, 들어가."
강아지들을 이끌어 초가집 안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귀견들 중 무리의 서열 1위인 덩치 큰 검은 개 한 마리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더니, 밤하늘을 향해 길게 짖기 시작했다. 짖음은 보통 때와 달리 날카롭고 경계심 가득한 소리였다.
민성이 귀견의 시선을 따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불빛 하나가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그는 자신의 강화된 시력을 이용해 그 불빛에 집중했다. 마치 근거리에서 보듯이, 아주 선명하게 그 불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드론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민성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요즘 세상에…' 그는 잠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누가 험한 산을 직접 발로 뛰며 수색한단 말인가. 드론을 띄워서 찾아올 줄이야. 그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 드론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초가집 주변을 얼마나 오래 정찰했을까? 그리고 언제 선우 그룹의 '그림자'들이 직접 이곳으로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민성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시간이 없었다.
민성은 지체 없이 마당 한쪽의 작은 돌멩이를 주워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드론을 향해 던졌다. 강화된 힘과 정교한 조준력으로 던져진 돌멩이는 정확히 드론의 프로펠러 부분을 강타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은 불꽃을 튀기며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결국 박살이 난 채 민성의 발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민성은 박살 난 드론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초가집 안에 있을 미나와 호연, 그리고 만신 할머니를 향해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촉즉발의 긴박함이 서려 있었다.
"얘들아! 할머니! 온다! 그 놈들이 와!"
민성은 서둘러 만신 할머니를 자신의 수련 공간이었던 작은 동굴로 모셨다. 좁고 깊숙한 동굴은 자연적인 요새와도 같았다.
"할머니, 이곳에 잠시 숨어 계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굴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민성을 바라보았다. 민성은 귀견들을 불러 모아 동굴 입구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너희들은 할머니를 잘 지켜야 한다! 절대 아무도 들어오게 해선 안 돼!"
귀견들은 충성심 가득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영적인 힘을 가진 만신이라 해도, 무력을 앞세운 그림자들 앞에서는 그저 힘없는 노인일 뿐임을 민성은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와 귀견들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민성은 재빨리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곧바로 미나와 호연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따라와라."
민성이 발걸음을 돌리자, 아이들도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민성이 며칠 동안 무학산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자연이 만들어낸 정교한 요새였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바위 절벽이 갈라져 만들어진 듯한 지형으로,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지만 발아래로 넓게 펼쳐진 산자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동시에 이들의 몸은 바위틈과 굴곡진 지형에 완벽히 숨겨질 수 있었다. 접근하는 자들은 이 험준한 산세 속에서 고작 한 사람, 한 아이를 찾아 헤매겠지만, 이곳에선 매복한 이들이 오히려 유리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옆으로는 높지 않은, 하지만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고 가파른 오솔길이 나 있었다. 민성은 선우 그룹의 '그림자'들이 굳이 험준한 산등성이를 헤치고 오기보다, 접근성이 그나마 나은 이 길을 지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곳은 그들의 치열한 전투를 위한 완벽한 전장이었다.
고요한 밤, 무학산의 거대한 품속에서 민성, 미나, 호연 세 사람은 곧 들이닥칠 선우 그룹의 그림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나의 눈동자는 깊은 밤하늘처럼 흔들렸지만, 그 안에는 아빠와 호연을 지켜야 한다는 중학생 특유의 책임감이 두려움과 뒤섞여 이글거렸다. 그녀는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옆에서 바짝 얼어붙은 채 눈만 껌뻑이는 호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둠에 대한 순진한 공포가 역력했지만, 민성의 단단한 등과 누나의 옆모습에서 희미한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는 쇠구슬이 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아빠와 누나가 가르쳐 준 '생존'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그들은 단순한 추격전이 아닌, 가족과 자신들의 생존을 건 필사적인 전쟁을 준비라도 하듯이, 각자의 위치에서 날카로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차가운 산바람이 그들의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제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불꽃처럼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