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편
호주의 매일 사소한 일상 중에, 나는 내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시속 60~70km로 달려오는 차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 뒤로 물러나 서 있곤 했다. 한국에서 늘 차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버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쌩쌩 달리던 차들이 횡단보도의 멈춤선에 맞추어 멈춰 서서,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곤 했다. 빵빵거리지도, 멈추는 척만 하며 계속 가지도, 나를 피해 위험하게 지나가지도 않고 말이다. 그것도 단 한 번도 빼지 않고, 매 번.
그게 호주에선 너무 당연한 것이었지만, 보행자 중심이 아닌 자동차 중심이었던 한국에선 정말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매번 차가 날 위해 멈춰 서 기다려줄 때마다 난 정말 지칠 줄 모르는 감동, 또 감동에 휩싸이곤 했다.
십여 년을 살았지만 난 아직도 늘 감사하게 된다. 그건 아마도 단순히 차가 횡단보도에서 규칙을 지켜 서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을 중시하는 그 문화와 풍토가 '정말 사소한데서, 전혀 사소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상의 작은 감사는 보행자였을 때뿐만 아니라, 버스의 승객이었을 때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호주에 도착하고 몇 년간은 나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차가 한 대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직장이 자전거로 가기엔 좀 멀었고, 드문드문 한국의 시골 버스처럼 다니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편리하지가 않기도 해서였다.
어쩔 수 없이 필요에 따라, 남편이 차를 직장에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아침에 차를 몰고 가 버리면 나는 어디든 걸어서, 혹은 버스로 필요한 곳을 다녀와야 했다. 물론, 내 두 어린아이들을 유모차에 싣고서 말이다. 힘들었지만, 덕분에 호주의 버스 이모저모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유모차를 밀고 버스에 타기 위해 줄을 서면,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 나보고 먼저 타라고 했다. 그렇게 제 1순위로 올라타려고 하면, 꼭 기사나 승객 중 누군가가 항상 유모차를 함께 올려다 줬다.
그렇게 버스를 타면, 기사는 나에게 주로 ‘How are you, today?’라고 물었고, 손님이 많지 않은 날엔 날씨 얘기나, 이런저런 다른 얘기마저 할 때도 있었다.
어떤 연말엔 털털한 중년의 남성 기사가 자신의 크리스마스 휴가 계획을 세세히 얘기해 준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전혀 모르는 기사였는데도 마치 옆집 아저씨 마냥 참 편했다.
버스가 출발해서 달리다가, 도로에 ‘오리 대가족’이라도 지나갈 때면, 기사는 버스를 도로 한 가운데 세워놓고 오리 가족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 번은 파란 혀 도마뱀 (blue tongue lizard)이 지나가서 그걸 한동안 기다린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호주 사람들은 시간도 많고 여유가 넘치는구나 싶었다. 버스의 어느 누구 하나 빨리 가자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기사도 느긋하고, 약속시간에 늦을까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것 같았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난 후로 나는 항상 시간을 여유롭게 출발하는 습관이 생겼다. 적어도 1시간 이상씩은 늘 일찍 출발하곤 했다.
한 번은 정류장에 버스가 섰는데,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휠체어가 버스에 올라타는 걸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정말 궁금해하며 그 휠체어의 승차 방법을 지켜보았다.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상태에서, 무슨 트랜스포머도 아닌 것이 버스 몸체가 통째로 아래로 쭈욱~ 내려갔다. 버스가 인도에 최대한 가깝게 내려갔을 때 후문 쪽에서 아주 완만한 경사의 램프가 쑤욱 나왔다. 그 장애인은 유유히 그 위로 휠체어를 타고 올라와서는, 버스의 지정석으로 가 천천히 휠체어를 고정시키고 안전벨트까지 매었다.
정말 신기했다. 버스 자체가 내려가다니! 부럽고 또 부러웠다.
물론, 지금은 한국에도 저상버스들이 많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흔치 않았을 때였다. 한국의 저상버스에서도 램프가 내려가긴 하지만, 호주처럼 버스 자체가 내려가지는 않는다. 당연히 램프의 경사가 호주 버스보다 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트랜스포머 버스보다 더 신기하고 부러웠던 것은, 바로 사람들의 태도였다. 기사도, 승객도, 불평하는 사람도, 찡그리는 사람도 하나 없었고 모두 웃는 얼굴로 그 장애인에게 인사를 하고 돕는 것이었다. 정말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진심으로 인간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는, '특정 인간이 아닌 모든 인간'을 배려하고 소중히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부럽고 또 한편으론 창피했다, 내 나라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것이.
옛날 한국에선 초스피드로 달리는 버스에서 하차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항상 내리기 전에 미리미리 나와 서있곤 했었다. 요즘 한국은 많이 바뀌어서 차가 정차한 후에 일어서라고 방송이 나온다. 하지만 오랜 습관에 길들여져서일까, 방송을 믿지 못해서일까 사람들은 여전히 정차 전에 뒷문 앞에 가서 서 있는다.
호주에선 아무도 미리 문 앞에 가서 서 있지 않는다. 버스기사가 서둘러 출발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벨을 누르면 버스가 서서히 정차하고, 그럼 사람들은 그제야 하나둘씩 일어나 하차하기 시작한다. 정말로 여유로운 광경이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고, 외세의 침략을 받을 위험도 사실상 거의 없는 곳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배부르게 먹고살 수 있고, 몹쓸 병에 걸려 가진 재산 다 날리고 길바닥에 나 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 살면 누구나 그럴 수 있을까?
호주에서 버스를 탈 때는 반드시 Hi, How are you?, How's it going?, How're you doing? 등의 가벼운 인사를 하도록 하자. 그리고 하차시에도 'Thank you.'라고 하고 내리자.
한국에서는 버스기사들이 승객에게 인사를 하는 건 많이 보지만, 승객이 인사하는 것은 거의 잘 못 본다. 4년 전 한국에 와서 나는 버스를 타거나 내릴 때 항상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어떤 경우는 내가 탄 노선 내내 거의 나 혼자만 인사를 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 비교적 도시가 작거나 노선이 빈번하지 않은 경우는 인사하시는 분들을 조금은 더 자주 보기는 하지만 일반적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한 번쯤은 남들이 뭐라건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하고 타고 내린다면 어떨까? 그런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조금 더 용기를 얻어 그들도 똑같이 하게 되고, 그렇게 인사하는 풍토가 좀 널리 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서로 따뜻해질까.
우린 늘 사회 탓을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바로 사회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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