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편
이민자 영어반 학생들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평판이 자자한 브론윈 (그렇다, 바로 그 김치 냄새를 견딜 수 없어하던 분... 하지만 정말 좋은 선생님이셨다)이 아침 일찍부터 교무실에서 나를 찾았다.
브론윈 이야기 읽기
레벨 2에 한국에서 새로 온 윤주라는 학생이 있는데, 호주 문화를 너무 잘 이해 못하고 힘들어한다며 한 번 만나서 여러 가지 설명 좀 해 줄 수 없겠냐는 거였다.
잠시 후 뒤따라 교무실에 들어온, 아직 서른도 채 안 된 것 같은 윤주와 짧게 대면을 하고는, 수업 마치고 같이 차를 한 잔 하며 더 긴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윤주가 교실 밖에서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어, 빨리 오셨네요?”
“네, 이 삭막한 호주땅에서 한국인 선생님을 만난다니 너무 흥분돼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진짜 빨리 뛰어왔어요.”
윤주의 그 한 마디에 그동안 그녀가 견뎌야 했던 마음고생과 외로움이 전해오는 듯했다.
교재를 교무실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고 우리 둘은 구름다리를 건너, 캠퍼스에서 조금 떨어진 커피숍으로 향했다. 낮에는 아주 한산한, 가까운 학교 카페를 두고 일부러 더욱 인적이 드문 그곳까지 간 건, 마음 놓고 호주를 ‘까라’는 나의 세심한 배려이기도 했다.
윤주는 한국에서 호주 남자랑 사랑에 빠져 1년 전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 전엔 호주를 너무 그리워했던 남편을 따라 호주에 살러 왔단다.
그런 윤주의 입에서 봇물 터지 듯 쏟아져 나온 호주 사는 얘기들은 심히 편향되어 있었다.
‘여긴 정말 살 곳이 못 된다.
호주 사람들 넘 이기적이다.
호주인들 넘 멍청하다.
이 나라 심심해서 못 살겠다.
인종차별이 너무 심하다.
발음도 넘 후지고, 너무 우물우물거려서 잘 못 알아듣겠다. (자신의 남편 발음은 어땠을지 궁금했다.)
인터넷이 넘 느리다.
징그러운 벌레들이 넘 많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것까지 사사건건 트집 잡는 걸 보니, 호주 정착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주 말에 다 동의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맞장구 쳐주며 억눌려 있었던 감정들이나마 다 쏟아내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얽힌 타래가 풀려 나아지려나 했지만 결국 윤주는 6개월 뒤에 도로 한국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이혼했다는 소식도 둘러둘러 들려왔다. 많이 안타까웠다. 윤주도 그 남편도.
그런 윤주가 했던 많은 얘기 중에는 내 얼굴을 좀 부끄럽게 했던 것도 있었다.
“얼마 전에 E동에서 수업받을 때, 어떤 나이 진짜 많고 커트머리에 맨날 화려한 목걸이하고 입술 빨갛게 바르고 다니는 선생님 있잖아요?, 그 선생님이 저보고 ‘대학은 나왔느냐?’, '한국에도 좋은 대학이 있느냐?', ‘글은 읽을 수 있느냐?’하면서 무시를 하는 거예요. 게다가,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꼭 따뜻한 점퍼를 입고 나가고 샌들을 신지 말고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는 둥 아프리카 학생들과 똑같이 취급하는 거예요. 얼마나 열 받고 짜증 났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니, 세상에, 한국사람이 아프리카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게 말이 돼요?... 브론윈 선생님이 선생님(나)을 소개시켜 줘서 다시 한국인인 게 얼마나 자랑스러워졌는지 몰라요. 마구 구겨졌던 자존심이 완전히 다시 쫙~ 펴지는 것 같아요. 진짜 너무너무 자랑스러워요~”
윤주의 묘사를 들으며 나는 대번에 그녀가 어떤 선생님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미리엄은 70대 노령의 선생님이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장을 하며, 몸치장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리엄은 스스로가 노령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주로, 말은 잘 하지만 읽을 줄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인 아프리카계 학생들을 가르쳐 왔었다. 미리엄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한국’이란 나라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이 별 차이가 없을 법도 하단 걸, 호주에 오래 살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미리엄의,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몸 어딘가에 깊이 박혀있는 ‘백호주의’ (백인 우월 사상)가 늘 떨쳐낼 수 없는 불편함으로 날 따라다니곤 했다. 친근하긴 했지만, 절대 나를 같은 사회적 레벨로는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그녀의 얼굴 표정과 어투에서 읽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호주인들보다 더 뛰어나야 할 이유가 거기 있음을 다시 되새기곤 했다.
나마저도 편치 않은 이런 미리엄에게서, 윤주가 의도치 않게 상처를 받았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무엇보다도 같이 일하는 이들 중에 백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날 부끄럽게 했다.
호주의 백호주의를 여전히 가슴 한쪽에 품고 살아가는 많은 노년층의 호주인들 중에는 내가 호주 온 지 얼마 안돼 알게 된 베티도 있다. 내가 살던 아파트의 바로 위층에는 60대의 호주 토박이 젊은 할머니, 베티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제 갓 돌을 지난 손주를 돌봐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거의 동갑내기였던 내 아들을 데리고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아니 놀러 가야만 했다. 거의 반 강제로 놀러 오라는 걸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티가 종이에 뭘 좀 적으라고 했다. 그러다간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보고 영어를 쓸 수 있냐고 물었다. 방금 적으라고 했다가, 다시 영어를 쓸 수 있느냐고 묻는 건 또 뭔 일인가 싶었다.
“저 언어학 공부했어요.”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러니까 영어를 쓸 수 있는 거지?” (So, you CAN write?) 한다.
순간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싶었다. 지금껏 매주 영어로 그렇게 수다를 떨고 시간을 보냈는데, 게다가 언어학도 공부했다는데... 왜 자꾸 묻는 거지?
그러다 ‘아, 영어로 공부한 걸 말 안 했구나,’ 싶어서 “호주 대학원에서 '영어'로 교육학 석사도 했어요.” 했더니 좀 미심쩍은 눈빛으로 아까 내밀었던 종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이것저것 적으라고 했다.
정말 오래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다른 한국 학생들을 보면 내가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나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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