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편
이번은 세 번째 이사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같은 동네 안에서였지만, 이번엔 아이의 학교에 가까이 가기 위해, 살고 있는 곳에서 제법 떨어진 남쪽으로 이사를 갈 터였다.
이사 가기 얼마 전 ‘더 크러니컬' (The Chronicle; 한국의 벼룩시장 같은 신문)을 읽다 보니 신문 제일 뒷면 광고난의 이삿짐센터들이 갑자기 눈에 확~들어왔다. ‘$60/h. NO HIDDEN COSTS!’ 한 시간에 60불에, 숨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순진하게도'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아주 씩씩하고 시원시원하면서도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광고에서 봤겠듯이 절대! 숨은 비용이 없으며, 다른 데서는 받기도 하는 ‘call-out fee’ (먼 곳에서 수리 등을 위해 나갈 때 받는 출장비) 같은 것도 절대! 없다고 안심시켜줬다. ‘절대! 없다’는 얘기를 매번 자신 있게 강조하는 걸 보니 정말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나는 또 순진하게도 그걸 믿었다.
일주일 뒤 토요일 아침 9시로 이사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짐은 그 전날 대략 거의 다 싸 뒀다.
호주에 올 때 달랑 여행가방 3개만 들고 왔기 때문에, 그 몇 년 사이에 늘어난 짐이라 해 봐도 첫 이사 때 왔던 ‘Robert Bros Removals’ (롸벝형제 이사) 사람들이라면 한두 시간이면 될 양이었다.
두 번째 이사 때는 처음과 같이 ‘롸벝형제 이사’를 이용했었다. 그들은 최소 기본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적어도 2시간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짐도 없고 이동거리도 짧아서 문에서 문까지 1시간이 겨우 조금 넘게 걸렸다. 그러자, 그들이 되레 미안해서 다 못 받겠다며 기본 200불에서 20불을 깎아주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그 힘센 형제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저렴한 곳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어 열심히 찾던 중이었다. 지난번보다 짐도 조금 더 늘었고 거리도 더 머니, 그때보다는 비용이 많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시간당 60불이면 넉넉잡아 3시간이라 해도 60X3=180불이고 넉넉~잡아 4시간으로 쳐도 240불 밖에 안되니 정말 숨은 보물을 찾은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토요일이 되었다. 럭비 선수 같이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사람 한 명과, 일주일을 굶은 것 같은 몰골을 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체구가 작은 다른 한 명이 같이 왔다.
전화상에서와는 다르게 그들은 무척 엄상궂어보였고, 그날 내게 전해온 전체적인 육감은 ‘전과자들’ 같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내가 조금이라도 도와서 같이 옮길라면 절대!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일하는 게 너무 느려 터져 달팽이도 그보다는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워낙에 짐이 없었기에, 그렇게 심하게 늑장을 부리고도 점심때가 되기 전에 짐싸기가 끝났다. 싸는 건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이사 가는 집에 가서 빨리 짐을 풀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이 둘이나 있었던 나는 그곳의 가까운 친구 집에 남았고, 남편은 이삿짐 차를 따라 새로 이사 갈 집으로 떠났다.
그렇게 떠난 지 무려 7시간!!
해는 지고,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내게 걸려 온 남편의 전화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주유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는 여유롭게 점심을 먹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커피에, 담배까지 피우곤 천천히 다시 출발하기까지 무려 2시간여. 그리곤 어렵사리 새 집에 도착. 짐을 푸는 도중에 소파 다리를 하나 부러뜨리고, 여러 가구에 흠집을 내 가며 짐을 다 푼 시간이 무려 저녁 6시경.
그들이 내민 송장엔 60X9=$540, 거기다 call-out fee가 120, 도합 660불이었다는 거였다.
남편이 내가 분명 ‘call-out fee’가 없다고 했다 전하니 ‘당신 부인 영어를 잘 못하나 보지? 내가 분명히 출장비가 추가로 붙는다고 했지. 그것도 없이 누가 퀸베얀 (캔버라와 인접하는 NSW주의 끝 동네)에서 여기까지 나오겠어?' 라며 되레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남편은 쿵후를 15년이나 한, 무술을 엄청 잘하는 사람이었다. 까짓 남자 둘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짐도 아주 천천히 옮기더니, 점심 먹은 2시간은 왜 포함시키느냐?"라고 묻자, 간단하지만 무시무시한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우린 당신이 어디 사는지 알아. 그리고 당신은 매일 일하러 가고, 낮엔 당신 부인과 어린애 둘만 집에 있지? 우리가 그걸 안다는 것만 기억하라고!"
순간 남편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고, 그들이 요구하는 액수를 아무 불평 없이 줬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서로에게 보이지 않으려 참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내가 너무 한심했고, 남편은 그런 나를 위로해 주기에는 아직 울분을 참는데 만도 힘이 부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아주 한참 동안 남편은 직장에 갈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고 했다. 물론, 집에 남아있던 나도 현관 벨이 울릴 때나 집 앞에 사람들이 서성거릴 때면, 주체할 수 없이 무서웠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두 번 누군가에겐가 너무나 억울하고 힘들었던 그때의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그 집은 짐은 안 들고 갔잖아. 왜 그 김경호 씨 친척인가는 이번에 시드니로 이사 가는 중에 아예 트럭채 몽땅 싣고 종적을 감췄다더라고. 못 들었어? 이민 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겠어? 그러니까 자기는 감사해. 그 정도면 천만다행인 거지! 안 그래?”
짐을 트럭에 실은 채로 들고 튀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던 가 보았다. 그런 이야기를 그 이후로도 계속 간간이 들었으니까.
지금 돌아보아도 그때의 마음고생이 생생하다 못해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긴 했다.
하지만, 그 힘들었던 기억을 이제는 감사하는 일로 기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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