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수학여행을 갔더랬지.
H는 평소처럼 씩씩하고 용감하게 무대에 나와 이문세의 '파랑새'를 부르고 들어갔다. 작은 키에 별로 예쁘지도 않은 H는 오리처럼 '뒤뚱뒤뚱' 우습게도 걸어서 자리에 들어갔다. 그런 H가 나는 너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곳곳에서 나타나는 H를 피할 수가 없었고 급기야 나는 Y에게 H의 욕을 마구 해대기 시작했다. "쟤는 정말 왜 저렇게 나대는 거야?..."
2012년 말, 한국에 온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었다.
밴드라는 것에 누군가가 나를 초대해 주었고, 누구의 음악밴드에 나를 초대한 것인가 하고 들어가 보니 뜻밖에도 동창들의 밴드다. 밴드라는 것에 채 익숙되기도 전에 낯익은 이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며칠을 고민을 하다 H에게 문자를 보냈다. "안녕, H. 나 기억하니? 여태 호주에 살다 얼마 전 한국에 들어왔어. 할 말이 있는데 언제 한 번 시간 내줄 수 있니?" H는 나를 단박에 기억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가장 불어를 잘하던 아이로. 영어가 아니라 불어를 잘하던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니 신기하기도 새롭기도 했다. H는 미룰 것 뭐 있냐며 그날 바로 보자고 했다. 판교에서 회기까지 H는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8시가 넘어 모습을 나타냈다.
1984년 5학년, H를 처음 보았다.
미술학원에서. 너무나도 활달하고 어떤 불만도 없어 보였던 아이. 늘 친구들에게 둘러 싸여있고 집안이 부유하여 물질적인 부족함이 전혀 없던 아이. 그 이후로 내가 H 없는 곳에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정도로 H는 모든 곳에 있었다. 전교임원 회의에도, 청소년연맹단에도, 내 친구와의 만남에도, 미술학원에도, 영어학원에도.... 그렇게 H를 한 해도 빠짐없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쭈욱 곁에서 봐야 했다.
다시 2012년 가을
H는 여전히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최신형 BMW를 몰고 나타났다. '아, 옛 모습이 그대로 있구나...' 나는 조금 긴장이 되고 손에 땀도 차올랐다. '과연 잘하는 일일까?' 나름 유명한 이태리 레스토랑에서의 멋진 식사를 준비했지만 H도 나도 음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그녀를 부른 이유가 H는 궁금했을 것이고, 나는 마음의 준비도 덜 된 오늘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 좀 더 숙고했어야 하는지 곱씹고 있었다. 겉돌던 대화를 끝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실은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 궁금증을 억누르며 H는 안 그래도 자주 깜빡이던 눈을 더욱 새차게 깜빡였다. "어, 그래 뭔데?" "......" "......" "실은 우리가 참 오랜 세월을 알고 지냈잖아. 그런데도 더욱 신기한 건 너랑 나랑 그렇게 친하게도 되지 않았다는 거지, 그렇게 많은 친구들과 사건들을 공유했음에도 말이야... 그런데, 나 고등학교 즈음에 너를 참 많이 미워했어. 이유 없이 너가 많이 미웠어. 너는 내가 너를 미워한 걸 몰랐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게 항상 너한테 많이 미안했어. 너는 몰랐지만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십 년쯤 전 아이러브스쿨이 한국에서 유행일 때 난 호주에 있었거든.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고는 그때도 널 찾았는데, 어떻게 너의 이메일을 알게 되어서 엄청 장문의 글을 썼어. 그런데 내가 전송을 눌렀는데 뭐가 잘못돼서, 인터넷이 안됐는지 컴퓨터가 안 됐는지 그 장문이 몽땅 다 날아가고 말았어. 그런데 그땐 한 편으론 안도가 되었어. 그런데 십 년이 더 지나 밴드에서 니 이름을 봤는데 가슴이 많이 답답하고 미안한 거야.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어. 이유도 없이 너 많이 미워했던 거. 정말 미안했어, 그땐...... 내가 좀 더 어른이 되어서 뒤돌아보니 너가 참 많이 부러웠던 거 같아. 내가 가지지 못한 거, 가질 수 없었던 걸 너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느꼈던 거지." "... 흐흐 난 또 뭐라고. 나보고 할 말이 있다길래 뭐 나를 좋아했다거나 뭐 이런 고백이나 되는 줄 알았다." H는 너무 어이가 없었을까, 괜찮다는 말도 알았다는 말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은 어색하게 조금은 어정쩡하게 헤어졌다.
1992년, 대학 MT를 갔다.
평생 노래를 거의 불러본 적이 없었던 나는 아는 노래가 거의 없었고 가사를 외우는 데도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가사가 간단하고 부르기도 편했던 이문세의 '파랑새'를 연습하여 부르기로 했다. MT에서 노래를 안 부르고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연습을 하고 또 했다. 하지만 결국, 당일날까지도 가사를 다 외우지 못한 나는 종이에 적어 파랑새를 무대에서 부르고는 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어서 내려왔다.
2018년 6월, H가 생각이 난다.
판교에서 부동산을 하는 그녀는 오늘도 고구마로 저녁을 때웠을까? H는 여전히 나를 불어 제일 잘하는 아이로'만'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 바로 H가 달려오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H를 만나려 했을까 아니면 밴드에서 탈퇴를 했을까?... 6년 전 H에게 사과한 일은, 정말 참 잘한 일이다. 이제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내 마음에 무거운 짐을 덜어낼 수 있어서 가벼워서 좋다. 사과는 H에게 했지만 덕은 엉뚱하게도 나 자신이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