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편
아이와 단 둘이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랜만에 주말에 비디오나 볼까 하고 근처에 있던 우체국에 들렀다. 호주 우체국은 단순 우편 업무만 보는 곳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구류, 책, 잡화 등을 팔았다. 어떤 곳은 그 안에서 꽃을 팔기도 했고, 비디오를 대여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호주에서는 우체국을 Post Office가 아닌 Post Shop이라고 한다.
그곳의 우체국에는 꽃은 없었고, 비디오만 벽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비디오 가게가 사라진 한참 뒤에도, 호주에는 여전히 비디오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아무 생각 없이 입구를 들어서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약 1초간 아이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내 몸의 자동 반응이어서 내가 어떻게 이성적으로 행동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천천히 걸어서 가게를 구경하는 척하며 비디오가 진열되어져 있던 곳으로 향했다.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제 유치원생인 아이는 눈치도 없이 내가 정말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말을 뱉고 말았다.
“엄마, 저 아줌마는 눈이 왜 저렇게 튀어나왔어요? 팔도 진짜 짧고, 무서운 외계인 같아요...” 순간 당황했던 나는 아이에게 나중에 나가서 설명해 주겠다고 하고, 일단 가게 안에서는 얘기하지 말자고 했다.
내가 아까 아이의 손을 꽉 쥐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외계인을 보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당황했다. 그녀의 눈알은 반쯤 튀어나와 거의 떨어질 것 같았고, 한쪽 팔은 거의 어깨에 붙어 있었으며, 다리도 엄청 짧아서 높은 스툴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나중에 계산할 때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도 어린아이와 성인의 중간쯤 되는 일상에서 자주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것은 그곳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불편하게 주시하지 않았고,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손님들의 계산을 도와주고 있었던 거였다. 손님도, 당사자도 모두 아무렇지 않게 각자의 일을 보고 있었지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건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자꾸만 그녀를 쳐다보려 했고, 나는 무례한 행동이니 쳐다보면 안 된다는 주의만 계속 줄 뿐이었다.
정작 빌리고자 했던 비디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비디오 진열장 앞에서 한참을 왔다 갔다만 하다가, 결국은 아이가 원했던 포켓몬 스티커만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용히 그냥 나왔어도 되었는데 왜 굳이 뭔가를 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녀를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던 것 같다.
계산대에 서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안녕하세요? 오늘 바빴나요?" 하며 인사를 건넸고,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네, 오늘은 좀 한산한 편이네요. 이게 다인가요? 4불 50센트예요."라고 했다.
가게에서 나와 차로 돌아가는 길에서 아이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는데, 아까 가게의 그 아줌마는 그냥 조금 더 다른 모양으로 태어난 거란다. 엄마의 눈은 갈색이지만, 조이 선생님 눈은 초록색이지? 그 아줌마의 눈은 다만 엄마의 눈보다 조금 더 앞으로 튀어나왔고, 팔과 다리는 좀 짧지만, 그냥 우리 모두가 다 다르듯이 그 아줌마도 그냥 다르게 생겼을 뿐이야. 엄마 눈 색깔이 조이 선생님과 다르다고 누가 나를 오랫동안 이상하게 쳐다본다면, 엄만 정말 불편할 것 같아. 그러니까, 이제부턴 우리랑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봐도 절대로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하지는 말자. 우리 때문에 누가 마음 아픈 건 싫잖아, 그치?”
솔직히, 아이에게 이 말을 하는 내내 나는 너무 부끄럽고 가식이 내 온몸에 덧칠된 것 같아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나 스스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 못했으면서, 감히 아이에게 가르치려 하다니…
하지만, 솔직히 그 기회를 삼아 나도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었다면 조금은 변명이 덜 구차할까 모르겠다.
내 말을 새겨들으려 했던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건지 아이는 조용했다. 어쩌면, 아이는 여전히 인간들의 세계에 숨어 살고 있는 외계인들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생김새를 한 누구도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는 호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에 흠뻑 젖어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10여 년 전 미국에서 온 한 동료가 내가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한국에는 장애인이 별로 많이 없네? 한국인의 유전자가 더 우수해서 그런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굳이 나는 "실은 그게 아니라..."하며 구차한 변명과 설명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서 다시 그 질문을 떠올려보니 그건 무지로 가장한 일종의 조소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아를 둔 한국인 부부가 그들의 행복은 포기하고, 아이를 위해 굳이 멀디 먼 호주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한국에 올까?...... 오겠지... 아니,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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