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조금 유명해지면 종종 묻는 말이 있다.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책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신기하게도 거의 다들 한 권씩 인생 책의 제목을 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인생 책이 무엇이었나 생각해보지만 딱 한 권 이거다 할 만한 책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너무나 많은 책들이 그 당시의 나에게 영향을 끼쳤고, 영향력이 없었던 책이 나중에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까.
그런데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나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음악은 있다. 나를 조금 자세히 관찰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파헬벨의 캐논이다.
내가 캐논을 들었던 것이 89년인지 90년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걸 들었던 순간은 마치 사진의 한 장면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가장 처음 들었던 건 조지 윈스턴의 December(겨울) 음반에 수록되어 있던 캐논의 변주곡이었다. 고등학교 방송실에서 흘러나오던 그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얼어붙은 채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왜 울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그 음악을 들으면 여전히 감정이 추스러지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조지 윈스턴의 뉴에이지 음악을 모조리 다 사모으기 시작했고 모조리 다 들었다. 하지만 캐논만큼 나를 사로잡은 곡은 없었다. 나는 공테이프 앞면과 뒷면을 모조리 캐논으로 녹음하여 몇 시간을 캐논만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게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았던 게 캐논이었다.
90년대에 조지 윈스턴이 부산에 공연을 왔던 적이 있었는데 티켓 가격이 싸지 않았다. 나는 그 공연을 꼭 보러 가고 싶었지만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거금을 주면서까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표를 사 주겠노라고 했지만 결국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와 그런 식으로라도 시간을 보내고파 하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에 더 슬퍼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나는 결국 혼자서 그의 콘서트를 보았다.
호주에 살 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내 친구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캐논을 가르친 다음 나를 위해 캐논 깜짝 콘서트를 열어주기도 했다.
둘째 아이는 피아노를 시작하고 언젠가 나를 위해 캐논을 배우겠노라 하더니, 나를 위해 정말로 캐논을 연주해 주었다.
나는 나에게 선택권이 있었던 모든 경우의 소리는 다 캐논이었다. 전화벨의 링톤도 항상 캐논이었으며, 알람도 캐논이고, 가끔 작업을 할 때의 백색소음도 캐논이다. 유튜브에서 캐논을 검색했을 때의 일이었다. canon을 쳤더니 정말로 1시간 반짜리 캐논이 떴다. 같은 캐논이 1시간 반 동안 계속 반복되는 거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공테이프 앞뒷면 캐논으로 채웠던 게 생각났다.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50여분에 가까운 다양한 악기로 연주한 캐논도 있다. 한국 가야금이 들어간 캐논 모음도 있다. 수년 전부터 이런 영상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야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보게 되었다. 다들 하나같이 나처럼 캐논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평생 링톤이 캐논이었다는 사람, 몇 시간을 캐논만 듣는다는 사람, 아들이 힘들 때 듣는 음악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캐논이었다는 여성, 내 인생 음악이다는 수많은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전 세계에 퍼져있었다.
나는 내일도 캐논을 들으며 일어날 것이고, 내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모든 일들은 캐논의 울림으로 나를 상기시킬 것이며, 상대의 전화는 캐논의 멜로디로 나에게 수신될 것이다.
우리는 다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다만 아무도 드러내지 않기에 알지 못할 뿐.
당신은 이상하지 않다.
참 괜찮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