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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Feb 04. 2016

직함 말고 직업 말고 내 이름으로

호주 편

애나는 시간이 다 된 것도 모르고 여전히 열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영어로 설명해도 거의 대부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레벌 1 학생들을 붙잡고서 말이다. 보통 낮은 레벨이 가르치기 쉽다고 생각들 하지만, 실제로 가르쳐 보면 가장 낮은 레벨을 가르치는 게 실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된다.  모국어가 제각각 다르고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영어로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농담을 한 번 하기 위해서도 온 갖가지의 몸개그를 동원해야 조금이나마 웃어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낮은 레벨은 어느 정도의 경력과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 아니면 보통 잘 맡기지 않았다.


지금껏 낮은 레벨을 오랫동안 가르쳐 온 애나는 경험도 많고 잘 가르치기도 했지만, 너무나 완벽주의자라 스스로도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항상 완벽한 수업을 추구했고, 실제 강의도 너무나 완벽히 계획서와 같이 오차 하나 없었다. 감사가 나올 때면, 매니저는 항상 애나의 강의일지만 보여줬을 정도니까.


이런 애나가 너무나 힘들어 보였던 그날의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와서는 씩씩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그반에 새로 온 학생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한국에서 새로 온 학생이었는데, 영어 듣기도 말도 거의 못 하는 정말 기초 수준의, 50대 후반이 안 될 것 같은 중년의 남성이었다고 했다. 


“대체 내가 내 이름은 ‘애나’라고, 앞으로 애나라고 불러 달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도 계속해서 ‘Yes, teacher. Yes, teacher’만 반복해대니 정말 돌겠더라고!"


한국에선  옛날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선생님을 존경해. 50대쯤이라면 젊은 층과는 다르게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의 마지막 세대일 거야." 


“난 정말이지, 학생들이 날 ‘Teacher’라고 부르는 게 너무 싫어. 난 존경받는 것도 너무 부담스러워. 내 이름으로 불러주는 게 제일 편하고 좋다고. ‘teacher’는 내 직업이고,  영어에는 'Teacher'라는 타이틀도 없으니 그냥 내 이름 '애나'로 불러달라는 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수평적 사회관계에 익숙한 많은 호주인들 중엔 상하관계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혹 있었는데, 애나가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시아의 문화를 잘 이해해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애나는 매 학기 학생들에게 '수평적 관계'를 가르치느라 진을 빼는 것 같았다. 


결국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Yes, teacher’를 고수하던 학생에게 애나도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Yes, Student'로 부르며 복수(?)를 했다고 했다. 헐~ 


각각의 문화에선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사고가 상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고서는 이렇게도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가르쳐 준 날이었다. 


상대를 부를 때 이름으로 바로 부르는 호주식 호칭은 10년을 살았어도 끝까지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거의 본인의 직위와 상호 관계상의 위치가 정해지면 자신이나 상대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호주인들은 직책보다는 이름을 바로 불렀다. 한국인들이 상대를 누구누구 엄마, 우리 남편 아내, 우리 아들 딸, 과장님... 등으로 부른다면, 호주인들은 보통의 경우엔 그냥 이름으로 바로 불렀다. 매니저든, 선생님이든, 철수 엄마든. 즉, 남편도 my husband 보다는 Greg (바로 이름으로)로, 아들도 당연히 James likes..., 딸도 Trish went to..., 부인도 Anne thought..., 학교 선생님도 Patrick said...처럼 호칭보다는 이름을 바로 써 버렸다.


이런 차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 당혹스럽고 진짜 어려운 점은 다른 곳에 있다. 즉, 물어보지 않으면 굳이, '내 아이 이름이 James인데, James가 어쩌고 저쩌고'로 얘기하지 않고 바로 첫 문장부터 "James is..."로 말한다는 데 있다. 내용상으로 대충 유추가 되기도 하지만, 종종 아무리 내용을 끝까지 들어도 그 이름의 주인공이 도대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도 하다.  


한 번은 내가 친한 동료랑 얘기를 하는데, 누군지 설명도 하지 않고 당연히 내가 안다는 듯이 Julia가 어쩌고 저쩌고 계속 얘기를 하는 거였다. 첨엔 정말 내가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얘기를 벌써 줄줄이 하고 있었던 터라 뒤늦게 쥴리아가 누군지 물어보기도 뭐하고, (물론, 한국인의 특성인 질문을 최소화하려는 경향도 일조했을 테이지만) 속으로만 그게 누구인지 맥락에서 파악하려고 마구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비슷한 경우에 부닥치면 나처럼 타이밍 놓치고 곤란해지기 전에 그게 누구인지 바로바로 묻는 게 좋을 것이다. Excuse me, but who’s James?/ Can you tell me who James is?/ James is your son, right?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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