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편
아이들 학교가 파하는 3시 15분까지는 14분이 남았다. 보통 늦어도 3시까지는 와야 학교 가까운 곳에 주차할 자리가 있는데 그날은 1분 차이로 학교 주위에 주차할 자리를 단 한 곳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땅덩어리 넓은 호주에서 허구한 날 주차할 자리를 찾아다니다니, 조금 우습기도 했다.
제법 몇 분 떨어진 거리에 차를 주차하고 잠시나마 책을 집어 들고 읽으려는 찰나 바로 앞에서 재키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허긴, 아무리 멀리 있었어도 재키는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키가 190센티에 가까운, (특히 내겐) 엄청난 거구로 보였으니까.
재키는 네덜란드계였는데 3남 2녀 중 자신이 가장 작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절대, 네덜란드에서 살지 않을 거야!" 다짐했었다. 나는 호주에서도 충분히 작았으니까. "흑흑"
또 한 번은, 호주에서는 실내에서 거의 신발을 잘 안 벗는데 언젠가 신발을 벗은 235mm의 내 "표준 사이즈"발을 어떤 호주인 여성이 너무 신기하게 보고 또 보고 또 보며, 어떻게 발이 그렇게 작을 수 있는지 신기하다 했을 땐 참으로 "흑흑흑흑"이었다.
아무튼, 급히 문을 열고 나가 그런 거구의 재키에게 인사를 했다.
“이게 누구야? 재키! 오늘 목요일 아냐? 목요일은 다니엘이 방과 후 돌봄반에 가는 줄 알았는데? 오늘 일하러 안 갔었어?"
“어, 갔어. 근데 어제 다니엘이 내가 지난달에 일본 시부야에 혼자 다녀와서, 나에게 화가 났다고 하더라고. 나중에는 좀 울기까지 하더라고. 자기가 일본에서 포켓몬 카드나 장난감을 더 사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알면서, 내가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을 걸 믿을 수가 없었대."
“왜 안 데리고 갔어? 일본 망가(manga)랑 장난감 엄청 좋아했을 텐데."
“그건 알지만, 엄청 저렴하게 나온 패키지였어. 거의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낚아챘지. ‘지금 당장 하거나, 아님 기회를 잃거나’하는 그런 종류의 딜 있잖아, 그런 거였어. 게다가, 그 주는 다니엘이 아빠랑 지내는 주여서 (다니엘의 부부는 이혼을 하고 각각 1주일씩 번갈아가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더욱 별 생각을 안 하기도 했지. 게다가 내가 다니엘을 데려가면 분명 쿠퍼(다니엘 동생)도 가고 싶어 했을 거야. 그럼, 내가 유치원생과 초딩 2학년을 데리고 무슨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냐고!"
“허긴, 뭔 말 하는지 이해가 좀 돼.... 그래서 오늘 휴가 내고 애들 데리러 일찍 온 거야? 애들한테 미안해서?"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는데, 일본 가느라 휴가를 딸딸 긁어 다 써 버려 남은 게 없는 거야. 근데, 오늘 오후에는 일하는데 계속 집중도 안되고, 계속 모니터만 멍 때리고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지. 그래서, 매니저한테 가서 물어보기나 하자 생각했지."
“뭘 물어봐? 집중이 안되니까 그냥 집에 가는 게 낫겠다고?"
“바로 그거지! 내 마음이 여기 없는데, 제발 내 몸을 내 마음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면 안 되겠냐고. 내일 더 열심히 일 할 걸 약속한다고 했지."
“뭐?!! 진짜 그렇게 말했어? 레알이야? 그리고 뭐, 매니저가 또 그러라고 했어?... 뭐 정말? 우와, 호주 정말 좋은 나라야. 만약 한국이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매니저한테 가서 물을 용기조차 안 났을 걸?"
“왜? 묻는 게 뭐가 어려워서? 항상 물어야 돼.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아, 한국에선 아니야. 한국에선 그런 질문은 하면 안 되지. 그럼, 안되지. 만약에 했다면, 그리고 매니저가 가도 좋다고 했다면, 그다음 날 사무실 책상이 다 비워져 있을 걸 각오해야 돼."
“난 제대로 일 안 할 거면 할 이유가 없다 생각해. 머리가 작동을 안 하는데, 책상에만 앉아 있음 뭐하냐?"
“내 말이! 그러니까 호주가 천국이라고. 우리는 천국에 사는 거라고."
“아, 내일 일하러 안 가고 싶다. 목요일에 퇴근을 일찍 하면 이런 부작용이 있구나… 내일은 금요일. 아, 나를 아프도록 유혹하는구나."
“뭐가 유혹한다고? 설마!... 진짜??"
“나 열이 좀 나는 거 같아, 한기도 들고. 아무래도 내일 집에서 쉬어야겠어. (찡긋~) 어, hi, Sammy"
잠시 재키가 다른 엄마와 얘기하러 간 사이, 근처에 있던 조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조, 오랜만이에요! 요즘 별 일 없어요?"
“아, 요즘 정말 몸이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요. 온 가족이 유럽 여행을 한 달 다녀오려니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아직 하우스 시터 (house-sitter: 집이 비는 동안 와서 화초에 물 주고, 동물들도 봐주는 등 집 봐주는 사람)도 못 구했고, 로이(조의 고양이)도 데리고 갈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네요."
“이야, 저도 그런 걸로 머리 아팠으면 좋겠네요. ㅎㅎ 언제쯤 출국 예정인가요?"
“부활절 휴가가 시작되면 가요. 2주 정도 더 휴가 내어서 한 달간 다녀오려고요. 2주는 프랑스에 가 있고, 나머지 2주는 영국에 가서 가족들도 좀 보고 오려고요."
한국 사는 내 동생이 언젠가 동남아로 3박 4일로 여행 다녀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즐기기 위해, 매일 정신없이 체험하고 구경하느라 바빴거든. 근데, 하루는 해변을 지나가는데 모래사장에서 선탠을 하면서,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외국인이 있는 거야. 야, 정말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부러워 보일 수가 없더라고. 대체 얼마나 시간이 많아야 그런 휴양지에서 한가로이! 누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건지 말이야."
호주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 지를 종종 고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호주인들은 일해서 벌면 그걸로 여행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 보내고, 적당히 꾀병도 부려가며 산다. 어찌 보면 매일 정신없이 일하며 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항상 적당히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한국에선 재충전의 시간도 눈치 보느라 가지지 못하고, 모두가 '방전되어 가는 건전지로 연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충전이 가능한 건전지를 언제든 얼마든지 재충전하여 쓸 수 있는 호주인들은, 평생 단 한 번도 충전이라곤 생각도 못 해보는 우리의 일회용 건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호주에는 참으로 휴가 종류도 많은데 그중에서도 병가휴가가 대표적이다. 연차휴가 (annual leave)는 안 쓰면 계속 쌓여서 결국 모아서 쓸 수도 있지만 병가휴가 (sick leave)는 쓰지 않으면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어떻게든 다 쓰려고 한다. 자신이 아파서 쓰는 병가(sick leave)와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파트너 등이 아파 돌봐줘야 할 때 쓰는 병가 (carer's leave)를 합쳐서 그냥 'sick leave'라고 하는데, 아프지 않지만 꾀병을 부려 병가를 써먹을 땐 이를 'sickie'라고 하고, 'take a sickie'는 그런 병가를 내는 걸 말한다.
너무나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오랜 관행이므로 어느 누구도 진짜로 아픈지 아닌지 굳이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옛날 한국에서 개근상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상으로 여겨졌는데, 호주에서 언젠가 어떤 직원이 감기에 걸려서 직장에 나오자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언급되었다. 호주에선 아픈 걸 참고 미련하게 일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휴가를 적당히 잘 이용하며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게 오히려 덜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우리 모두 호주에선 가끔씩 "Let's take a sic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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