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편
캐서린이 한국에 왔다.
입양아인 챨리를 위해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부부가, 혹은 둘 중 한 명이라도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나왔다 간다. 나와 캐서린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나와 함께 일하던 둉료인 브론윈의 아들, 데릭이 언젠가 한국어로 번역할 일이 생겼고, 그 일을 내가 해 주면서 그 부부와는 몇 번 식사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 후로, 그들이 한국 위탁모에게 쓴 편지는 항상 내가 한국어로 번역을 해 주었고, 한국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도 가끔 도와주는 정도가 되었다.
데릭과는 제법 잘 통했지만, 왠지 소설가 겸 은행가라는 캐서린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었다. 내 눈엔 정말 말라보이는 그녀가 자신은 마르지 않아 다행이나 한국 여성들은 정말 너무 말랐다고 했을 때, 나는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으며, 명품백을 들고 온 몸에 브랜드를 걸친 그녀가 한국 사람들은 명품이나 허영을 좋아한다고 들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빈정거리지 않고는 답할 수가 없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너무나 한국적일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호주인적인 면이 있는 절대 내겐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4월의 어느 날, 서울을 구경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일단은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를 둘러보기로 하고 몇 시에 만날까 하고 물으니 12시 반쯤이 좋겠단다. '음, 점심을 일단 먼저 먹고 구경하자는 뜻이겠군.'하고 경복궁내에 어디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있는지, 광화문 어디서 식사를 하고 경복궁으로 가면 될까 동선을 나름 열심히 짰다.
토요일이었던 당일,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정문에서 겨우 만난 그녀.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입구를 들어가려고 한다. '어? 밥을 먼저 먹어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던 나는, "배 안 고파요? (Aren't you hungry?)"라고 물었고, 내가 한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그녀는 "아뇨, 아침을 늦게 먹어서 그런지 아직 안 고프네요." 그리곤, 옆의 아들을 보며, "찰리, 너도 아직 배 안 고프지?"한다.
상황이 조금은 애매하고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서 구경하다 배 고파지면 먹자고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근정전을 지나고, 경회루를 돌아, 민속박물관까지 다 보는데 아무런 말이 없다. 아, 다리는 아프고 목은 마르고... 박물관에 들어간 걸 핑계 삼아, "앉아 쉬며 커피 한잔하고 갈까요?" 하니, "커피가 마시고 싶어요? 그럼, 그래도 좋구요." 이건 대체, 날 위해 쉬어주겠다는 건지 뭔지 조금은 빈정이 상할 것도 같았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아이가 마실 핫 초콜릿과 쿠키도 샀다. 물론, '내'가 쉬자고 했으니 커피값도 내가 냈다. 정말 맛대가리 없는 커피였다. 그 커피점 원두 때문이었는지, 바리스타 실력이 형편없었는지, 아님 상황이 그런 맛으로 기억하게 했는지는 모른지만.
궁을 나와 잠시 북촌을 둘러보고, 다시 광화문 일대로 들어와 아이를 위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있는 '세종이야기&충무공이야기'에 갔다. 아이는 열심히 뛰어놀고, 나는 지쳐갔다, 허기로 인해서! 웃음은 점점 가식이 되어갔고, 나의 모든 신경은 내 위로 향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아마 4시는 족히 넘었을 거 같다. 점심도 아니고, 저녁을 먹기도 이른 시간이고... 커피를 또 마시고 싶지는 않고, 밥 먹자는 소리는 안 하고... 그러다 우연히 위층 식당가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이때다 하고 나는 "음, 맛있겠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안 먹었는데 배 안 고파요? 난 무지 배가 고프네."하며 반 강제로 밥을 먹자고 한 꼴이 되었다. 정말이지, 난 그때 그렇게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그날을 두고두고 좋지 못한 기억으로 채울 것 같았다.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그러자고 했고, 유명해 보이는 중국집에 들어간 나는 메뉴판을 보기 시작했다. 점심은 자기가 살 테니 맘껏 주문하라고 했지만, 남이 사는 식사를 정말로 맘껏 주문하기에는 그곳의 가격들이 착하지가 않았다. 결국, 가장 덜 미안할 것 같은 짜장면 두 그릇과 볶음밥을 시켰다. 그곳의 짜장면이 엄청 유명하다는 주인장의 말을 들으니 괜찮을 것도 같았다.
잠시 후, 짜장면이 나왔고, 나는 특별히 크지도 않았던 그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비워가는데 그녀는 거의 반도 먹지 않았다. 물론, 7살인 그녀의 아이도 볶음밥의 반의 반도 먹지 않고 있었다. 거의 그릇을 다 비운 내가, "배 안 고파요? 왜 이렇게 조금밖에 안 먹어요?"라고 하자 돌아온 답은 나의 빈그릇을 무색하게 했다. "난 원래 이렇게 많이 먹지 않아요." 그 간단한 말이 내 귀에는 '난 너같이 돼지처럼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하지는 않지'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물을 홀짝홀짝 마시며 그녀는 자신이 얼마 전 뉴욕에 책 사인회를 위해 갔었다는 얘기, 가족 모두가 챨리를 위해 유럽 여행을 2주간 다녀왔다는 얘기, 데릭이 아이를 위해 1년을 쉬었으니 이젠 자신이 일정기간 쉬는 게 합당하다는 얘기 등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들을 들으며 나는 단지 빨리 집에 돌아가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분명 캐서린이 호주의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다.
호주의 사회 구성은 중산층이 압도적으로 많고, 하류층과 극빈층이 조금 있으며, 상류층도 하류층만큼 있는 다이아몬드꼴을 하고 있다. 그런 얼마 안 되는 상류층 중엔 평범한 중산층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다른 많은 상류층의 사람들은 중산층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런 상류층 동네는 보안요원들이 곳곳에 지키고 있어서 아예 잘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한다. 물론, 명품과 사치, 허영으로 가득 찬 이들도 많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알았던 한 건설회사의 간부 A는 초, 중, 고를 멜번에서 가장 비싼 사립으로 나온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는 최 상류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들의 생활방식과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그곳에 보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보내야 했다는 것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었을 것이다. 50을 바라보던 그는 평생을 동창들보다 뒤떨어져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당시 살고 있었던 캔버라 집도 시가 8억 정도 되었고, 늘 옷도 백화점 브랜드가 아니면 안 입었으며, 음식도 와인도 최고급만 먹었다. 어느 날 그에겐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우울증이 찾아왔고, 그는 그 이듬해 자신의 고향인 멜번으로 이사를 갔다. 물론, 그곳에선 더욱 잘 사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 캔버라 집을 판 8억에 7억을 더해서 15억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물론, 그는 앞으로 평생 불필요하게 7억을 갚는라 우울증이 금방 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수수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호주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분명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다. 공무원이었던 우리 부부는 대개 중산층의 사람들과 어울렸지만, 어쩌다 아주 상류층 혹은 그들에 속하고자 노력하는 A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알게 모르게 그들이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이며 인간미 없게 느껴지는 것이 싫었다. 남편을 그걸 나의 '열등감'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캐서린이 다녀간 후,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만났던 호주인들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호주인들은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면 '모닝티(morning tea)'나 '오후 간식(afternoon tea)'이었거나, Bring a plate (각자 한 접시씩 들고 가 나눠 먹는 것), 피크닉도 BYO (Bring Your Own; 각자 먹을 음식은 각자 들고 가 각자 먹으며 서로 즐거운 시간을 각는 것), 직장에서의 생일파티도 10시 반쯤 오전 간식시간을 이용해 케잌과 과일, 간단한 요리 등을 먹었으며 종종 그걸로 점심을 때우는 이들도 많았다.
그럼,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 않았을까? 가끔 크리스마스 때는 크리스마스 만찬에 초대를 받기도 했으며, 캐나다 가족들로부터는 추수감사절 만찬에 초대를 받았고, 대사관에서 한인 행사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식사로는 대부분 만찬에 초대를 받았었다. 점심에도 초대를 많이 받았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주로 한국인들이 점심 먹으러 오라고 했었던 경우였다. 그렇다, 한국인들은 반드시 점심에 초대했다. 거의 차만 마시러 오라고 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차를 마시고도 점심때가 되면 반드시 식사를 또 했다.
호주 친구들과 점심 저녁을 같이 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는 어떤 특정 이유, 즉, 누군가나 무언가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라거나 한 경우였다. 늘 식사 초대를 받아가면 격식을 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호주에는 식탁이 두 개인 집이 종종 있는데, 손님이 오시면 부엌의 4인용 둥근 테이블이 아니라 'dining roon' (식당 방)의 8~10인용 테이블에 앉게 되는 적이 많았다. 가끔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 비격식적인 경우에도 편하게 각자 먹고 싶은 걸 시키고, 먹기 싫으면 안 시키고, 물론, 계산도 각자 하곤 했다.
반면, 한국인들은 밖에서 만나는 경우도 거의 대부분 점심이나 저녁을 먹었고, 내가 배고프지 않다고 나만 차 마시고 상대는 밥 먹고 하는 경우도 없었다. 다 같이 밥을 먹는 거다, 배가 부르든 말든. 그리고 당연히 계산도 한 사람이 몰아서 했다. 밥을 먹자고 했거나, 가장 연장자이거나, 은혜를 입었거나 뭐 이런 사람들이.
다시 말하자면, 호주인들에게 식사는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만큼의 의미는 없는 것 같았다. 한국에선 전쟁과 가난으로 오랫동안 굶주린 기억이 많아 먹는 게 문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천연자원이 풍부해 한 번도 배고픔을 알지 못했던 호주인들은 누군가를 만나 꼭 식사를 해야 할 이유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다. 그러니, 호주인들을 만나 배가 고파지면 배가 고프다고 말하자, 그리곤 식사를 하러 가자. 아무도 그걸 자신이 사겠다고 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반대도 안 할 것이니. 게다가, '내가 사겠다'는 말 한 마디면 완전 좋아할 것이다. 극구 사양할 수도 있지만, 엄청 믿을 수 없어하며 좋아할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그런 행운은 한국인과 함께가 아니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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