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편
제니퍼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자신은 여러 번의 수술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러지 못한 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늘 그녀를 괴롭혔던 것 같았다. 한동안 우울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고 했다. 자신을 조금 추스리기 시작한 지 얼마 후, 그녀는 초등학교의 도움반 선생님을 시작하게 되었고, 정신이나 육체적으로 도움이 필요했던 아이들을 도우며 서서히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성인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아주 붉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고, 옷도 아주 특이하고 밝은 옷을 자주 입었지만 늘 그녀를 감싸고 있는 화려한 색 위로 어두운 우울함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제니퍼는 대체적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바른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웃음이나 칭찬하는 말은 마치 '착한 사람 행동 지침'의 한 페이지에서 옮겨온 듯 부담스러웠고 부자연스러울 때가 없지 않았다. 그녀가 웃을 땐 덩달아 같이 웃으면서도 마음 놓고 편히 웃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를 의식하곤 했다.
이런 제니퍼를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아주 맘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항상 그녀의 가족 얘기에 대해선 조심해야 했고, 그녀의 웃음이 언제 울음이나 비평으로 바뀔지도 몰랐으며, 혹여나 그녀와 파트너가 되어 한 학기 간 수업을 해야 할 경우에는 교재 꼽아두는 순서에서부터 자료 정리, 테스트 및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정말 까다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입장에선 너무 융통성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나 원리원칙에 철저할 정도로 충실한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리는 업무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OH&S였다. 추가 수당을 받기 위해 자원을 했는지, 아니면 그녀가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여 매니저가 부탁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OH&S(Occupational Health & Safety)는 직장에서의 건강과 안전 관련 모든 항목을 말한다. 호주의 직장에선 모든 신입 직원들에게 입사 몇 주 안에 OH&S 관련 교육을 했으며, 호주에서 취업준비를 하는 이민자 학생들을 가르쳤던 우리도 당연히 가르치던 과목이었다. 호주에서 OH&S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또 기본적인 것이기도 했다.
언젠가 교무회의 때였다. 모두들 준비된 샌드위치와 과일로 요기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회의는 우리가 바랐던 대로 그다지 길지 않았고, 매니저는 곧 마지막 아젠다를 마치며 추가 사항이 있는지 물었다. 옆에 앉아있던 제인이 눈을 찡긋하며 오늘은 제발 제니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소곤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도록 제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니퍼가 발언을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2층 교무실에 프린터가 설치되어 있어요. 그런데 프린터를 사용할 때 나오는 그 미세한 입자가 호흡기로 들어가면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따라서, 지금 현재 교무실에 프린터가 있는 위치를 사람이 비교적 자주 드나들지 않는 복사실로 바꾸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몸에 해롭다는데, 그것도 OH&S 담당자가 발언하는데, 사무실을 나와서 계단을 올라 복도 반대쪽에 있는 복사실까지 가서 매번 프린트물을 가져와야 한다 할 지라도, 그것도 '제니퍼'가 그러자고 하는데, 감히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낼 만큼 강심장을 가졌거나 미련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내 귓전에 들려오는 ‘구시렁구시렁’이 나 혼자만의 소리는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나 다 구시렁거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누구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 들은 구시렁거림을 그녀는 못 들었던지 아니면 무시한 건지 곧이어 제니퍼는 한 가지 더 추가로 제안했다. “요즘 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의자수가 부족하여 임시 플라스틱 의자를 쓰는 교실이 있는데, OH&S의 항목에 따르면 플라스틱 의자는 아주 임시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 회의를 하고 있는 이 교실에도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필요시에는 쿠션 있는 의자를 더 구매를 하고, 플라스틱 의자는 반드시 쌓아서, 출입구를 막지 않는 한쪽 구석에 놓아주기를 바랍니다.”
제니퍼가 얘기하는 플라스틱 의자는 정말로 탄탄한 의자였다. 다만 쿠션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곤 뭐 그다지 허리에 그렇게 해롭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자기 돈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 정부 돈으로 푹신한 의자를 더 구매하라는 데 반대할 정신 나간 '또라이'는 없었다.
그날 이후 가끔 플라스틱 의자를 출입구 근처에 놓아두거나 어쩌다 그 위에 앉아있기라도 한 날은 제니퍼에게 반드시 한소리를 들어야 했고, 문서 한 장을 프린트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무실을 나가 계단을 오르고 복도 맞은편의 복사실까지 매번 걸어가서 들고 와야 했다. 시간이 바빴던 대부분의 우리는 그곳까지 주로 뛰어다녔다. 가끔 무언의 투덜거림을 오며 가며 눈빛으로, 표정으로 주고받으면서.
제니퍼는 응급처치 자격증 (First Aid Certificate)도 가지고 있었는데, OH&S를 담당하려면 당연한 게 아니었던 가 싶기도 했다. 그녀 외에도 응급처치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3~4명 이상은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로즈메리였다. 로즈메리도 원칙에 정말 지나치도록 민감했는데 그녀 역시 늘 웃고 있었지만 내겐 항상 사감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응급처치와 더불어 화재예방교육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렇게 철저히 잘 교육받았을까 싶다.
내가 일했던 직장에선 일 년에 두 번, 즉 한 학기에 한 번씩은 학생들에게 꼭 화재예방교육을 실시하곤 했다. 1년에 한 번은 소방서에서 나와서 교육을 실시했고 나머지 한 번은 각 반 선생님이 필요한 정보를 포함하여 가르쳤다. 로즈메리가 총괄 담당했던 것은 매 학기 실시하는 화재 비상탈출 모의 연습이었다. 화재 발생 시 각 층과 반마다 탈출 경로가 정해져 있었으며, 침착하게 그 경로를 따라 학생들과 탈출을 하고, 탈출 후 선생님들은 반드시 출석부에서 그날 출석한 인원을 확인해야 했다. 처음엔 익숙지 않았던 경로와 절차 과정도, 여러 번 하다 보니 힘들이지 않고도 자연스레 따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밖에 서 있으면 로즈메리가 돌아다니며 각 반 선생님에게 일일이 확인했다. 출석부는 들고나갔는지, 나가서 학생들의 수를 다 세고 이름을 확인했는지, 정해진 경로로 따라 나갔는지 등등.
원칙에 늘 충실했던 그녀는 화재나 응급처치 외에도 다른 원칙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았다. 한 번은 축제가 끝난 후 관련 사진이 게시판에 붙어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로즈메리가 교무실에 들어오더니 "방금 내가 게시판의 사진을 보고 오는데 거기에 자신의 사진이 학교와 관련하여 쓰이는 일에 동의하지 않은 학생의 사진이 붙어있더군요. 이거 담당이 누구였죠? 벤? 벤이었나요? 이와 관련해서 좀 알아보고 빨리 처리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 사진은 그 날이 저물기 전에 다른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한국에서 나는 그런 류의 동의를 해 본 적도 많이 없었지만 동의를 했다손 치더라도 그게 정말 지켜지리라곤 별로 생각지도 않았으며, 또한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사진이 책에, 플래카드에, 홍보용 책자에 실리는 걸 너무 많이 봤기에 그런 사소한 것도 지켜질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하고 강한 충격을 받았었다.
한국의 하는 둥 마는 둥하는 비상대피 훈련, 서류상엔 있지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규정들과 비교하여 볼 때, 호주란 나라는 절대 ‘대충하는 시늉’이 통하지 않는 사회구나 느낄 수 있었다.
뭐든 안 되는 게 없는 융통성 있는 사회와 융통성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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