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해지는 언어 생활
나는 언어의 사용에 관심이 많다. 왜 이런 상황에서 그 단어를 썼을까? 단어의 생성과 발전, 소멸 과정이 흥미롭기까지 하다.
'만들다'라는 뜻을 나타내고자 할 경우에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결합하는 단어가 다르다. 나는 유독 '짓다'에 관심이 많았다. '짓다'를 동사로 사용하는 명사를 보면 '이름, 옷, 집, 밥, 농사, 죄, 미소, 글' 등이다. '죄'를 제외한다면 뭔가 추상적이고 긍정적인 활동 들이다. 아울러 중요성도 높은 편이다.
'이름'의 경우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몸짓일 뿐인데 '이름'이 있고 나서야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게 존재가 인정되지만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냥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름'은 아주 중요하며 연결되는 동사도 아무 것이나 다 결합하는 것과는 연결해서 쓸 수 없다.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에 아주 중요하다. 지금이야 옷을 공장에서 '만들'어서, 시장에서 사 입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 옷은 '짓'는 대상이 된다. 입지 않고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아주 소중한 물건이나 아무 명사하고 다 결합하는 '하다'와는 결합해서 쓸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집'도 마찬가지이다.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이다. 밥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에게 밥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밥과 다른 반찬을 동일시 할 수는 없었을 터, 따라서 밥은 '짓고', 반찬은 '만들'었다.
그런데 반찬 중에서도 중요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류와 김장이다. '된장, 고추장, 된장'과 같은 장류는 다른 반찬의 바탕이 되는 것이며, 김장은 한 겨울 일용할 양식이 된다. 그 중요성이 다른 반찬과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장류, 김장'은 '만들다'를 사용하지 않고 '담그다'를 연결해서 사용한다.
식생활에서 중요한 '밥'을 짓기 위해서는 쌀이 있어야 하며 이 쌀은 '농사를 지'어야 나온다. 그러나 '농사'의 중요성은 밥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다'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농삿일 중에서 구체적인 일을 나타낼 때에는 '하다'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농사' 전체를 아우르는 경우에는 '짓다'를 쓴다.
손으로 요리조리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 '빚다'를 사용한다. 그래서 도자기나 송편, 만두를 예쁘게 빚는다. 송편이나 만두는 예쁘게 빚어야 아이들도 예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렇듯 '만들다'를 나타내고자 할 경우에도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였다.
짓다 : 옷, 밥, 농사, 집, 이름, 미소, 죄, 글
빚다: 도자기, 만두, 송편
담그다: 된장, 간장, 고추장, 김장
만들다: 물건을 만들다
하다: 구체적인 물건을 만들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의 일을 하다
불을 때서 완성한 밥과 전기밥솥에서 나온 밥의 차이라고 한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노동력이 좀 덜 들어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옷을 입기 위해서, 밥을 먹기 위해서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노동력을 대신할 만한 것은 가축 정도였다. 그러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노동이 들어가야 되니 삶을 영위하게 해 주는 그 결과물에 대해 말로나마 감사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는 경우에는 '만들다'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다'를 쓴다. '짓다, 빚다, 담그다'는 어느새 사라지는 말이 되고 있다.
요즘은 옷을 만들어서 입고, 밥을 해서 먹는다.
도자기를 만들고, 만두를 만들고 송편을 만든다.
배추 김치도 하고 무 김치도 한다.
여전히 의식주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그 수고로움의 양이 적어졌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까지 사라질 필요는 없을 텐데 결과물을 얻는 과정이 쉬워져서 그런지 단어도 점점 범용화되어가는 느낌이다.
들이는 노동력이 이전보다 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그 노동력에 대한 가치를 높여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