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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Dec 23. 2021

다슬기와 거머리

다슬기 잡다 소환된 거머리의 추억

  무더웠던 8월의 어느 화요일, 더위를 피해 덕두원 계곡으로 향했다. 

  주말이면 많은 가족들로 붐비는 곳, 마침 평일이기도 했고 오후에 비 소식도 있어 계곡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시원하게 물놀이도 하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 짹짹거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그늘에 앉아 한적한 시간을 보낼 생각에 엄마 아빠의 마음은 설렜다. 


  해솔이는 처음 계곡이라는 낯선 광경을 접하고 잔뜩 긴장해 있던 초여름과 달리 신나 보였다. 지난 7월 떠났던 열흘간의 제주 여행에서 물고기 뺨칠 만큼 물놀이를 많이 한 효과가 드디어 나타나는 것인지…. 잠시 의자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가 싶더니 물속에서 걷고 싶은지 자꾸만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내와 아이가 첨벙첨벙 물속 걸음마에 푹 빠진 사이 나는 양동이를 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해솔이에게 보여줄 다슬기를 잡았다. 무아지경으로 다슬기를 잡는 동안 뜬금없이 부모님과 함께 시냇가에서 거머리를 찾느라 진땀을 뺐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교과서에 플라나리아가 나온 적이 있었다. 맑은 물에 살고 머리가 삼각형 모양이라는 플라나리아, 이 요상한 동물로 하는 실험이 교과서에 있었는데 선생님은 실험에 쓸 플라나리아를 주말 동안 잡아오는 것을 숙제로 내주셨다(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 말씀이 플라나리아를 잡아올 수 있는 학생들만 잡아 오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숙제를 안 하면 하늘이 무너질 것 마냥 걱정했던 나는 주말을 맞아 편히 쉬고 계신 부모님께 다짜고짜 플라나리아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보채었다. 나의 성화에 못 이긴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한참 가서 미로면에 있는 천은사 계곡을 비롯하여 물이 맑은 곳을 찾아 오전 내내 돌아다니며 계곡 바닥을 헤집고 다녔지만 플라나리아는 구경도 못 했고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 사진에 나와 있는 플라나리아를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대로 빈 손으로 등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다시 한번 부모님께 플라나리아와 비슷한 동물이라도 잡으러 가자고 졸랐다. 결국 지금의 우리 집이 있는 곳 앞에 흐르는 작은 개천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거머리를 잔뜩 잡아 유리병에 담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이튿날 숙제를 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하게 학교에 갔고, 기다리던 과학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의 "오늘 실험에 쓸 플라나리아를 잡아 온 친구는 책상에 꺼내 주세요."라는 말씀과 동시에 가방에서 치열했던 수색 작업의 전리품을 꺼내려는 순간 다른 모둠 쪽에서 "우와!" 하는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한 친구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플라나리아가 잔뜩 담긴 초록색 사이다 페트병을 꺼냈다. 주말 내내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귀한 몸을 어떻게 저렇게 많이 찾았을까 하는 생각에 놀라기도 했지만, 순간 내 가방 속에서 빛을 볼 시간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을 거머리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결국 거머리들은 세상 구경을 못하고 가방에 담겨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는 소식은 알 길이 없다. 


  그 당시에는 병에 가득 담아 갔던 거머리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플라나리아를 잡으러 가야 한다고 보채는 아들에게 화 한번 안 내시고 하루 종일 온 강산을 돌아다니며 플라나리아를 찾아보고, 플라나리아의 대타를 찾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해솔이가 모처럼 맞은 주말에 플라나리아를 찾으러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면, 찾아도 찾아도 없는 플라나리아를 만들어서라도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도 싫은 티 내지 않고 아이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잠시 동안의 추억 여행에서 돌아와 양동이에 제법 담긴 다슬기를 아이에게 보여 주었다. 다슬기를 보고 '우와!'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봐 주는 딸내미의 모습을 기대한 것은 크나큰 욕심이었을까. 해솔이는 꿈틀거리는 다슬기들을 보고도 시큰둥한 것 같았고, 심지어는 자꾸 움직이는 다슬기들이 무서운지 어서 치우라며 울상을 지었다. 결국 다슬기로 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려던 아빠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한여름의 다슬기 잡기를 통해 아빠만 오래도록 묻혀 있었던 유년시절 거머리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생겼네?!'


  요즘 한창 말을 배워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 가끔씩 함께 대화하다 보면 '어,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네!' 싶은 지난 시간들의 추억들을 이야기하는 아이를 보며 놀랄 때가 있다. 다슬기를 보며 오래도록 기억에서 잊혀 있었던 거머리, 유년 시절의 부모님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떠오른 것처럼 해솔이도 언젠가는 무더웠던 한 여름날 아빠 엄마와 함께 계곡을 찾아 한발 한발 조심스러운 물속 걸음을 내딛던 일, 양동이에 가득 담긴 다슬기를 구경한 일, 따스한 햇살에 반짝이던 아름다운 윤슬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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