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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Oct 14. 2023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산길을 걷다

어린이집 가을 산행

  "아빠 쉬 했어요."


  "응, 얼른 일어나 화장실 가자."


  "쉬 했다고요."


  "…"


새벽의 전투 준비 태세


  딸내미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는 첩보를 듣고 전광석화같이 이불과 침대 커버를 끌어내렸다. '쉬야 사건'이 발생했을 때 관건은 매트리스를 사수하는 것이다. 걱정과 달리 오줌이 매트리스까지 침투하지는 않고 침대 커버에 그려져 있는 공룡들만 샤워시켰다. 천만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딸내미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급히 세탁기를 깨워 안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 몰래 오줌 사건 뒷수습에 들어갔다. 시원하게 쉬도 하고, 옷도 갈아입은 딸내미는 곧 다시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자는 둥 마는 중 새벽 시간을 누웠다 일어났다 하며 세탁기를 두 번 열어 빨래를 널었다. 오늘은 딸내미의 어린이집에서 부모 동반 가을 산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 새벽부터 거하게 준비운동을 했다.


  새벽의 전투를 치른 우리 부녀는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아내도 어린이집 뒷산이자 우리 가족의 평소 운동 코스인 국사봉 오르는 것을 참 좋아하지만, 다음 주 둘째를 맞이하게 되기에 오늘은 마음만 함께 하기로 했다. 주말인 데다 비도 조금씩 땅을 적시는데도 꽤 많은 가족들이 어린이집 마당에 모여 있었다.


  오늘의 등반 코스는 국사봉 정상. 익숙한 코스였지만, 평소와 달리 정상으로 가는 길 중간중간 미션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 있었다. 첫 번째 미션은 길을 오르며 서로 다른 나뭇잎 다섯 개를 주워 미션지에 붙이는 것이었고, 두 번째 미션은 길을 오르며 주운 도토리, 솔방울 같은 것들을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 던져 넣는 것, 그리고 마지막 미션은 국사봉 정상에서 멋진 인증샷을 찍는 것이었다.


  갖가지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 노란 우의를 입은 딸내미는 씩씩하게 산길을 오르며 미션을 위해 나뭇잎, 도토리, 솔방울들을 줍고 평소 어린이집에서 아빠에게 풀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를 이번 기회에 다 풀어놓으려는 듯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아이와 단둘이 국사봉에 오를 때는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정상까지 빨리 올라가기 위해 아이를 재촉하기 바빴지만, 오늘은 함께 오르는 가족들도 많고, 중간중간 미션을 해결해야 했기에 아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참 좋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옮기며 눈에 담는 가을 정취도 일품이었다. 몇 주 전 아이와 함께 국사봉에 올랐을 때만 해도 아직 가을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제 제법 떨어진 갖가지 낙엽들과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의 모습을 보니 정말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는 소중하다


씩씩한 공룡은 혼자 산에 올라갈 수 있어요!


  비와 땀이 범벅이 된 우리 부녀는 국사봉 정상에서 한껏 못난이가 된 얼굴로 추억 사진을 찍고 사이좋게 내려왔다. 평소 같으면 딸내미가 정상에서 내려올 때쯤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안아 달라, 간식 먹고 싶다 한껏 떼를 부릴 법도 한데, 오늘은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미션을 마치고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딸내미는 안아 달라는 말,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않고 즐겁게 산행을 마무리했다.


미션 성공!


  새벽부터 때아닌 대동여지도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과연 제대로 다녀올 수 있을까 싶었던 어린이집 가을 산행에서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며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오늘. 딸과 함께 걸으며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딸과 함께 도란도란 나누었던 이야기를 사진과 이야기로만 아내에게 전달하게 된 점이 조금은 아쉬웠다. 아내가 출산을 잘 마치고, 내년 가을에는 한껏 더 씩씩해진 딸내미, 그리고 새로운 우리 식구와 함께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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