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왜 지금 열었어. 눈치도 없이."
외투 위에 에코백이 놓여 있길래 열었을 뿐인데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에코백 안을 들여다보니 낯선 물건이 자리 잡고 있다. 예쁜 리본과 메시지가 적힌 작은 상자. 아내가 나 몰래 넣어둔 밸런타인 초콜릿이었다. 초콜릿과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보니 어쩐지 수상했다고 느꼈던 아내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씻고 나왔을 때 출근할 때 뭐 들고나갈 거냐고 물어본 것, 그리고 외투 위에 내가 꺼내놓지도 않은 에코백이 올려져 있던 것 등등. 아내의 기습은 실패했지만, 하루 종일 육아 모드로 차분하게 뛰던 심장이 연애 모드로 뛰는 것 같았다.
사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인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기대는 전혀 안 했다. 우리 부부가 ○○ 데이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도 있지만, 늘 지나고 나서 ○○ 데이임을 뒤늦게 알아채는 아내의 모습을 연애시절부터 합쳐 10년째 바라봤으니…. 기대하지 않았던 아내의 귀여운 선물의 감동 큰 물결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면 가족이 생기고 나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늘 특별한 선물을 받는다. 분명 지겨울 텐데 나의 넋두리에 가까운 지루한 수다를 끝까지 잘 들어주는 아내의 인내심. 아빠랑 노는 게 즐겁다며 잠들기 전까지 잘 놀 줄 모르는 아빠와 신나게 놀아주는 해솔이. 요즘 운동이 부족한 아빠가 걱정되는지 늘 품에 안고 돌아다니라며 신호를 보내는 둘째 해담이.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서 아내, 그리고 두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가 가족이 되지 않았으면 누리지 못했을 일상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인생의 추억이다. 밸런타인 초콜릿 선물 하나에 방구석 철학자가 된다.
맛있는 초콜릿을 좋아하는 아내. 아내는 내가 초콜릿 상자를 언제 개봉할지 목이 빠지게 기다리겠지만 나는 오늘의 감동이 또 오랫동안 망각의 바다에 잠길까 쉬이 상자를 열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