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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May 12. 2024

내가 겪은 이태원 무당 엄마

이태원 무당 클래스


 엄마가 무당이 되고 나서는 엄마가 날 챙겨주는 일은 더욱 드물었다. 그래도 무당이 되기 이전에는 내가 소풍을 간다고 하면, 김밥은 아니더라도 맨밥에 김치를 싸주기라도 했는데, 무당이 되고 서부터는 신경을 안 쓰거나 돈으로 때우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엄마 자신도 느꼈는지, 어느 날부터는 우리 집에 외할머니가 오셨다. 못 된 외삼촌들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외할머니를 모시는 것을 다들 꺼려하거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엄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7남매 중에서 장녀노릇을 했다고 했다. 엄마가 7남매 중에서 엄마 밑으로는 혁이 삼촌 하나뿐인 막내인데 말이다.

 외할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외할머니가 모든 살림을 도맡아서 도와주셔서 엄마가 조금 더 수월하게 신을 모실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경상도' 출신의 성격이 아주 일품인 여인이었으니까 말이다.

 우리 외갓집 사람들은 죄다 경상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명절 같은 날에 같이 모이면 그들의 평범한 대화조차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

 외할머니는 무언가 불만이 있으면 처음엔 엄마를 갈구다가 엄마에게는 통하지 않자 그 타깃을 나한테 돌려서 초등학교 6학년인 내게 퍼부어 대셨다.

" 느그 엄마한테 가서 일러라!!! 할매가 그러더라구! "

 분명 무언가 불만이 있는데 그걸 엄마한테 퍼부어 대면 분명 득달같이 달려들게 뻔하니까 대신 나한테 퍼부어대면 내가 엄마한테 이르게 되니까 나에게 퍼부어 대는 것이다. 엄마의 귀에 들어가라고 말이다.

 드디어 내 초등학교 학업이 모두 끝났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때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를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입학' 하니까 문득 생각났는데, 나는 그 '입학'이라는 놈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입학식날에는 엄마가 모는 오토바이 뒤편에 타고 학교 입구에서 내려서 운동장으로 걸어가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서 입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애가 걸어오는 데, 어기적 어기적 걸음을 못 걷는 것이다. 마치 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장애'에 대해서 편견이 매우 심할 때였는데, 우리 담임 선생님 역시 멀리서 장애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학생이 어기적 어기적 걸어오니까 가슴이 철렁했다고 했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께 다다랐다. 그러고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장애가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엄마는 웃으면서 아니라며 말했다.

" 하하하... 그게 아니라... 재성이가 꼬추수술을 했거든요... 그래서..."
" 아! 그랬군요... 하하...."

 그 시절 남자애들은 거의 백이면 백 '이것'에 자신의 고추를 팔아먹는다. 나 역시 그랬다. 엄마가 어떤 감언이설로 나를 꼬셔도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놈의 빌어먹을 '돈가스'에 내 고추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암튼 그 이후 내 담임 선생님은 자기가 맡은 아이 중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는 이야기를 엄마한테 대놓고 농담처럼 던졌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식에는 하필 입학식 3일 전쯤 맹장이 터져서 맹장수술을 했다. 그때는 맹장수술을 하더라도 매에 15센티미터가 넘게 배를 갈라 수술을 했기 때문에, 아직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 아무튼 그래서 국민학교도, 중학교도 입학식을 모두 망쳤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1학기가 미쳐 지나지 않았을 무렵 엄마는 전라도 지리산으로 기도를 떠났다. 엄마는 주로 지리산 구룡폭포 근처의 기도터에서 기도를 하는데, 엄마의 말로는 그 폭포에서 기도를 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다고 했다.

 자기가 한양굿이라는 것에 눈을 뜨고 보니까 지금처럼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고 있으면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폭포에서 자신의 신령님께 담판을 짓듯이 기도를 했다고 했다.

'내가 굿을 안경 쓰고 하게 할 것이 아니면 이 어두운 눈을 밝게 해 달라'라고 말이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실제로 그 이후로 집에 돌아온 엄마는 갑자기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 엄마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더니 갑자기 뜬금없이 가족들에게 말했다.

" 우리가 이사 가야겠다. "
" 엥?? 갑자기? 어디로? "
" 응. 서울로, 그런데... "

 그런데 엄마는 당분간은 엄마가 먼저 서울로 가고 나머지 가족들은 계속 의정부에 남아있으면 정착을 한 뒤에 불러들인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정말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나와 외할머니, 그리고 동생을 남겨놓고 서울로 이사를 가버렸다.

 엄마가 서울로 이끌려 가서 다다른 곳은 바로 용산구에 있는 이태원이었다. 이태원에는 이슬람사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대략 100미터 떨어진 곳에 반지하를 얻었다. 그 당시 엄마는 빚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이사를 간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사를 하는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현재 엄마의 단골들은 죄다 의정부에 살거나 의정부 근처 동두천, 양주 등지에 몰려 있으니까 단골 잡기부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태원동에 있었던 실제 왕룡암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이태원에 들어서서 '왕룡암'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신당을 오픈했는데, 예상했던 것처럼 손님이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없었다. 무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말이다.


 엄마가 신을 받고 나서 처음이었다. 이렇게 손님이 없어보기는 말이다. 엄마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태원이라는 동네를 분석해 보기로 했다.


 엄마는 신당에서 나와 이태원을 돌아다니며 분석을 했는데, 신당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낮엔 조용하고 밤이 되면 화려한 간판의 불이 켜지면서 사람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태원의 유흥거리였다.


 그 당시 이태원은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밤이 되면 수많은 술집과 나이트의 간판이 켜지고 밤새도록 쿵짝쿵짝 거리는 그런 동네였다. 그래서 엄마의 신당에는 손님이 없었던 것이다.


 이 놈의 동네는 낮이면 죄다 들어가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개떼처럼 나오니 이런 동네는 난생처음 본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전략을 바꾸었다. 엄마도 낮에 쉬고 밤에 간판의 불을 켜놓고 손님이 들어오길 바란 것이다. 그런 엄마의 전략은 예상적중했다. 정말로 밤에 간판의 불을 켜놓으니까 손님이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그때부터 엄마의 주된 손님은 화류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동두천이나 양주에 있던 그 '희진이 이모' 같은 부류와는 다르게 손이 엄청 큰 사람들이라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것이다.


 엄마에게 달라진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정부에 있을 적에는 주로 사람들의 '운'이라는 놈을 맞이하는 '운맞이굿'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태원에서는 성격이 조금 다른 굿이 주를 이루었다.


" 엄마. 나 꿈을 꿨는데...."


 나는 항상 이상한 꿈을 꾸면 아침에 깨자마자 엄마한테 전화해서 내 꿈이야기를 한다. 내가 그런 이상한 꿈을 꾼다는 자체가 신기했고, 또 나중에는 잘은 몰라도 그 꿈이 얼추 맞아 들어가는 것도 신기해서 그랬다. 반면, 엄마는 아들이 그렇게 딱딱 들어맞는 꿈을 꾼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원래는 자신이 아닌 아들이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될 팔자였는데 대신 받은 격이니 말이다.


" 무슨 꿈꿨는데? "

" 응... 꿈에 그 있지... TV에서 나오는 장군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커다란 칼을 나한테 휘두르면서 막 쫓아오는 꿈을 꿨어. "


 엄마는 그 꿈 이야기를 듣더니, 웬일인지 그 꿈에 대해서 해석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그 꿈은 바로 엄마가 곧 작두를 타게 될 것이라는 꿈이라는 것이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그런 무속적인 이야기를 내게 이야기를 한 것이 말이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그때부터는 엄마가 무당으로서 나의 그러한 신가물(신의 기운)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이 되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 이따금씩 나도 엄마가 굿을 하는 굿판에도 가볼 수 있게 되었고, 신당에서 절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되었다.


 그리고 의정부에서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다 마치고 우리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다. 물론 엄마가 있는 신당으로 이사를 간 것이 아니라 신당으로부터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건너편 반지하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뭐, 덕분에 나는 외할머니랑 같이 살면서 외할머니의 그 푸념을 내가 다 커버해야 했지만 말이다.



 참, 이태원으로 온 엄마의 주된 굿은 바로 '작두굿'이었다. 엄마에게 오는 화류계 이모들은 주로 자신들에게 돈 줄이 되는 손님을 만나게 해달라거나, 그런 쪽에 있기 때문에 늘 관재수*와 가까이하게 된다. 그래서 그 관재수를 젖히게 해 달라는 의미로 '작두굿'을 한다.


* 관재수 : [명사] 관청으로부터 재앙을 받을 운수.


 엄마의 첫 작두굿에는 나도 따라가게 되었다. 게다가 그 굿판에는 또 한 사람, 혁이 삼촌이 가게 되었다. 혁이 삼촌은 자기 누나가 정말 무당인지 의심을 하던 사람이다.


" 앗... 크... 아파라..."


 혁이 삼촌은 겁도 없이 엄마의 작두날을 손으로 스윽 만지며 그어본 것이다. 덕분에 혁이 삼촌의 손가락이 갈라지며 피가 흘렀지만 말이다.


 엄마는 작두의 여왕이었다. 사실, 엄마에게 굿을 걸었던 사람들이 전부 제대로 된 돈을 내고 굿을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 한양굿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한 번 피리 악사를 쓰고 보니까 피리 없이는 굿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주 적은 돈에도 굿판을 열었다. 사실상 굿판이 아닌 규모가 적은 '치성'을 해야 할 금액에도 엄마의 돈을 더 보태서 굿판을 열었다. 엄마에게는 돈 보다 한양굿을 배우는 것에 목적을 뒀기 때문에 굿판 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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