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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May 13. 2024

내가 겪은 엄마의 한양 12 거리

Feat. 물감테러사건

 엄마가 먼저 서울 이태원에 갔고 두어 달 있다가 남은 가족 역시 서울 이태원으로 이사를 갔다. 내가 지내는 곳은 엄마의 신당 건너편에 있는 반지하였다. 나는 내심 서울이라고 해서 의정부에 살던 곳보다 더욱 좋을 줄 알았다. 하지만 더욱 좋기는커녕 더 좁고 방도 2개, 게다가 반지하라니 약간은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지역 교육지원청으로 가서 전학 신청을 했는데, 엄마는 왠지 오산중학교에 떨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정말로 엄마의 바람대로 오산중학교에 배정이 되었고 그리로 전학을 갔다.

 오산중학교는 교문으로부터 걸어서 5분 정도 올라가면 비로소 중학교 건물이 보였다. 학교의 부지는 정말 넓었으며 건물 자체가 뫼 山자처럼 생겼다.

오산중학교 전경. 출처 나무위키.


 나는 솔직히 의정부에서 전학을 왔다고 해서 애들이 내게 텃세를 부릴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전학 첫날부터 어떤 애가 내 등뒤로 와서 뒤에서 날 끌어안은 모습으로 친하게 굴었다.

 다행이었다. 서울 애들은 의외로 착했다. 등뒤에서 날 끌어안고는 내게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웃고 떠들어대고 친하게 굴었다. 그런데 그 친하게 굴었던 행동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멍청하게도 전학 후 3일이나 지나서였다.

 처음엔 외할머니가 내 교복 상의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 재성아. 뭘 이렇게 묻혀 왔냐? 에그... 이거 물감이네... 빨아도 안 지는데 참말로. "
" 어? 언제 묻었지? 오늘 미술시간도 없었는데? "

 나는 그 물감 자욱이 그저 애들과 놀다 보니 묻은 자욱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물감 자국은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있었다.

 외할머니는 항상 내 교복을 매일 같이 빨아서 다림질까지 해서 주는데 내 새 교복에 물감을 매일 같이 묻히고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게 칠칠치 못하게 이런 걸 계속 묻히고 온다고 야단이셨다.

 그러고 4일째 되는 날, 그날도 별 이상 없이 등교를 했는데, 쉬는 시간에 항상 내 등뒤에서 날 끌어안고 내게 친하게 말도 붙여줬던 애가 멀리서 손에 아크릴 물감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그 애와 그 무리들이 내가 의정부 시골에서 전학 왔다며 날 놀려댄 것이다. 어쩜 물감을 묻혔다는 사실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지 뻔뻔함의 극치였다.

 나는 오늘날에도 이런 불합리한 사실이 있으면 주저 없이 주변에 알린다. 내가 그런 불합리한 것을 당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건 내가 중학교 때에도 그랬다. 아마도 그 애들이 내게 물감이 아닌, 폭행을 가했다고 해도 나는 그 아이들이 무서워서 숨는 편이 아닌, 어떻게 해서든지 주변에 널리 알리고 날 도와줄 사람을 찾았을 것이다.

" 선생님... 제 등 좀 보세요. "

 나는 교무실에 가서 내 담임 선생님께 찾아가서 등을 보여드렸다. 그리고 내 등에 물감 자욱들이 가득한 것을 선생님께 확인해 드렸다.

" 이게 뭐니? "
" 전학 온 첫날부터 창균이가 내 등뒤로 와서 끌어안고 친하게 굴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제 등뒤에 아크릴 물감을 묻히고 자기네들끼리 키득키득거리고 그랬어요. "

 내 담임 선생님은 사태를 심각하게 보는 듯했지만, 그 애들을 호출해서 야단치는 것에서 그쳤다. 하지만 나의 복수는 다른 선생님이 해주셨다.

 그 교무실에서 날 지켜보던 다른 선생님이 계셨던 것이다. 그 선생님은 과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셨는데, 늘 기다란 검은색 플라스틱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셨다. 그 다음날 그 과학선생님의 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는데, 화가 난 상태에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 전학생 등 뒤에 물감 놀이 한 새끼들 다 나와. "

 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애들이 그 소리를 듣고도 쭈뼛대며 능기적 거리자 그 막대기로 교탁을 '탁' 하고 세게 내리치더니 욕부터 나왔다.

" 이 새끼들이 장난하나 빨랑 빨랑 안 튀어나와? "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체벌은 너무나도 당연한 문화였다. 오히려 상당수의 학부모님들은 선생님이 자기 아들 딸들을 때려가면서 가르쳐 주길 원하고 또 그리 가르쳐달라고 부탁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그 과학 선생님의 호통 소리에 다들 나가서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고, 그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그 애들의 엉덩이를 20대씩 때리셨다.

 그 이후로 다행인 것인지 더 이상 애들이 날 건들지 않았다. 나 또한 다른 애들과 친해지면서 학교 생활을 했는데, 한 반에 2-3명씩은 외교관 자녀이거나 공직에 계신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꼭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아 역시 서울은 다르긴 다르구나'라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엄마가 스스로 배우고 있는 한양 12 거리 굿은 크게 4개의 파트로 나누어진다. 처음에는 그 굿판에서 가장 선배 만신이 앉아서 장구를 치면서 하는 '부정거리'이다. 이 거리는 말 그대로 굿이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모든 부정한 것들을 몰아내는 의식이다.


왕룡암 선생 [불사거리]


 그리고 두 번째로는 흰색 고깔을 쓰고 흰색 장삼을 입고 하는 '불사거리'이다. 이 거리에서는 주로 가정의 안녕과 건강, 자손들에 대해 빌어주고 공수를 주는 거리이다.

 세 번째로는 '산신 거리'이다. 산신 거리는 말 그대로 한국의 '산신령'을 위한 거리인데, 이 거리 말미에서 굿 의뢰자의 조상들이 무당의 몸에 실려서 쌍방향 통신을 하며 자손들의 건강과 나쁜 것을 제쳐주며, 조상들이 좋은 곳으로 가라고 길을 안내해 주는 거리이다.

 마지막으로 '대안주 거리'이다. 지금 북한 지역에 있는 개성시 지역에 덕물산이라는 산에 가면 '최영 장군'을 위한 사당이 있다. 이 거리는 그 '최영 장군'을 위한 거리이다.

 그 사당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갈 수 없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인왕산에 사당을 짓고 최영장군을 기린다. 무당으로서는 최영 장군이 가장 큰 장군신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굿 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에 대해서 약간의 첨언을 하자면, 예를 들어 우리 엄마가 자주 했던 '작두굿' 같은 경우 작두굿을 하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산과 바다를 돌며 기도를 한다. 여기서 벌써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굿판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굿판을 한 번 열려면 적어도 무당 3명은 기본으로 필요하다. 앞서 말한 4가지의 거리 하나하나가 엄청 오래 걸리기 때문에 혼자서 모두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래서 주로 3명이 저 4가지 거리를 나눠서 하는데, 그 굿판의 주인인 '당주'가 굿을 못하면 당주를 포함한 4명의 무당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무당 선생님들을 부르려면 저 시절 금액으로 적게는 50만 원에서 많게는 1백만 원 이상의 페이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3명이면 평균 80만 원씩 총 240만 원이 들어가고 거기에 보너스 개념인 '뒷돈'까지 계산하면 대략 1인당 총 100만 원 이상씩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한양 12 거리 굿에서는 반드시 빠지면 안 될 것이 바로 '악사'이다. 이 악사들도 기본적으로 무당들과 똑같이 가져간다. 엄마 같은 경우는 굿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피리를 부는 악사 1명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피리 악사, 대금 악사, 해금 악사 이렇게 3명씩 부른다.

 그렇게 되면 1천만 원 받아서 인적 비용만 6백만 원이 지출되는 것이다. 거기에 과일 값, 떡 값, 굿을 하기 위해 장소를 대여하는데 드는 비용, 수발을 드는 아줌마들에게 드는 비용까지 합하면 1천만 원 받아서 엄마가 가져오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하더라도 최소한 피리 악사와 대금 악사는 반드시 불렀다. 그리고 굿판을 열지 못할 적은 액수의 금액이라도 굿판을 열었다. 엄마는 오로지 굿을 배우기 위해서 굿에 미쳐 있었다.

 굿이 없는 평소에는 그동안 몰래 적어왔던 문서를 달달 외워서 집에서 해보고, 굿을 할 적에 무당들이 입는 신복이라는 옷을 꺼내서 직접 입고 연습하고, 부채를 자연스럽게 쥐는 법부터, 빨간색, 노란색, 흰색, 흑색, 청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5가지 깃발인 오방기를 멋들어지게 한 손에 쥐는 법이나, 발걸음을 떼는 법과 신복을 멋들어지게 넘기며 춤을 추는 법까지 연습했다.

 이태원에 이사 오고 나서 엄마는 선생님을 바꾸고 싶었다고 했다. 눈을 뜨고 보니 '태성 엄마'의 실력은 그렇게 크게 배울 것이 없는 수준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자주 가는 굿당(굿을 하기 위해 장소를 대여해 주는 곳) 주인 언니에게 소개를 받아서 정말 엄마가 한눈에 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님을 새로운 신엄마로 정하고 그 밑으로 들어갔다. 그 신엄마의 별칭은 '최대감'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대감'이라고 해서 남자가 아니라 그냥 별칭이 '대감'인 최 씨 성을 가진 무녀였다.

 이 세계는 신엄마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굿을 끼고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신엄마가 하는 굿을 보고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즉, 신엄마가 하는 굿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공부가 되고 가르침이 된다고 생각하는 문화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쳤다. 의정부에서 집을 잘못 사서 빚을 졌는데, 그 빚쟁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신당에 들이닥친 것이다.

 엄마는 그들에게 단 한 번도 이자를 밀려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욱 당당하게 말을 했다고 했다.

" 내가 선생님들께 이자 한 번이라도 밀린 적이 있어요? 내가 망하면 내게서 돈도 못 받아요. 그리고 매일 같이 이렇게 신당에 찾아와서 날 이렇게 괴롭히면, 난 돈 벌지 못합니다. 돈 못 벌면 당신들에게도 돈 못 갚아요. 진정 그걸 원하세요? "
 
 그랬더니 그 빚쟁이들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고 했다. 실제로 엄마가 이자 한번을 밀린 적도 없었고, 괜히 자기네들이 불안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 저 이렇게 괴롭히지 마세요. 분명히 돈 갚습니다. 나 이렇게 잘 나가고 있고, 선생님들이 절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곧 갚게 될 겁니다. 약속해요. "

 이렇게 엄마는 그들에게 당차게 말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부터 엄마는 굿판에 들어가는 비용을 단 얼마라도 줄이기 위해서 의정부에서 김장사를 도맡아서 해오던 새아빠를 관두게 하고 김 가게도 팔았다.

 그 당시 새아빠는 음악적 감각 하나는 엄마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엄마는 굿판에 새아빠를 데리고 다니면서 새아빠보고 장구나 제금(심벌즈 같이 생긴 전통 국악기) 등등을 눈치껏 배우라고 했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났던 새아빠는 금세 그런 악기들을 배웠고, 엄마는 인적 비용을 줄였다. 무당 선생님들을 신엄마와 또 다른 보조 무당 1명만 불러 진행하거나, 보조 무당 없이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빼도 엄마는 반드시 피리 악사는 꼭 불렀다.

 엄마는 굿을 배우느라 본인이 장구를 못 치기 때문에 새아빠에게 그동안 장구를 배우라고 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그동안 몰래 배웠던 것을 거꾸로 가는 굿거리라고 하더라도 본인이 뛰어들었다. 불사거리부터 산신거리 등 거의 모든 거리를 엄마 혼자 다 하고, 엄마의 신엄마에게는 대안주 거리 등등의 아주 중요한 거리만을 맡겼다.

 엄마는 그렇게 굿을 스스로 배웠다. 그리고 엄마가 굿을 스스로 배운 지 3년 정도가 지나고 1999년 11월, 남산 김구 동상 앞에서 '새천년을 위한 통일굿'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굿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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