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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May 16. 2024

내가 겪은 새 천년을 위한 통일굿

초 값이 없어서 허덕이는 무당

커다란 식당용 철 쟁반,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으로 외할머니가 2 사람의 식사를 담아가지고 내가 사는 살림집에서 건너편 신당으로 밥 배달을 다니셨다. 물론, 학교를 다녀오고 나선 할머니가 쟁반에 밥을 차려주면 내가 들고 배달을 다녔다. 

 엄마에겐 외할머니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밥부터 살림살이, 그리고 나와 동생의 뒤치다꺼리를 해주셨다. 특히 동생은 어릴 때부터 새아빠의 강요에 의해서 축구를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면 빨래거리가 한가득했다.

" 히에~~~ 이번 주는 빨래가 더 많네? 할매! 그냥 세탁기 돌려~ "
" 이그 세탁기 돌릴 것이 있고 아닌 게 따로 있으니까. "

이태원은 정말 신기한 동네였다. 내가 엄마의 신당으로 저녁 식사 배달을 할 무렵이면, 낮에는 조용했던 거리가 갑자기 시끌벅적 해진다. 초 저녁이 막 지날 무렵에는 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며 거리를 다니는 아저씨들, 그리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저 위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는 화류계 이모들이 거리로 우르르 나온다.

 특히 내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다. 우리 집은 경사가 약간 있는 동네였는데, 어느 날 저 위에서부터 평소처럼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면서 내려오는 이모가 있었다. 나도 평소처럼 길 가장자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이런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모가 점점 가까워지고, 또 가까워질수록 너무나 이상했다.

 분명 머리카락도 어깨 넘어까지 길고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우아한 발걸음으로 내려오는데, 정작 얼굴은 이모가 아니었다. 그런 외모에 얼굴은 분명 '삼촌'이었다. 어린 마음에 남자가 왜 저렇게 여장을 하고 다니나 싶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무척 궁금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이태원에 며칠을 더 살아보니 정답이 나왔다. 그런 사람들은 이른바 말로만 들었던 '게이' 였던 것이다. 실제로 엄마의 손님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장을 한 게이 손님도 많았다.

 엄마는 매일 같이 굿을 했다. 굿이 없을 적에는 집에서 굿 연습을 하고 또 했다. 그렇게 엄마가 신을 받은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고, 엄마에게는 무려 신딸도 제법 생겼다.

 엄마의 성격상, 돈이 없어 허덕이는 상황의 제자들을 그냥 무시하지 못하고 본인 돈으로 신당을 할 월세집을 구해주고, 살림살이마저도 엄마의 돈으로 사주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엄마를 바보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렇게 베풂을 받은 신제자들은 엄마의 은혜를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은 얼마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의 세계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정말 초값도 못 버는 그런 세계다. 돈도, 능력도 되지 않은 갓 신을 받은 애동제자들은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도망가버리거나 잠수를 타버리고 만다.

 엄마도 이태원에 처음 정착했을 때에는 2-3개월 동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다고 했다. 이자는 갚아야 하고 손님은 없고 그런데도 신당에 초를 켜고 기도는 해야 하고 그런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심지어 무당이 초킬 돈이 없어서 초를 훔치기도 했다고 했다. 이태원에서 조금만 가면 한남역이라고 있는데, 그 한남역 뒤편으로 강변가에 자리 잡은 작은 기도터가 있다. 그곳은 옛 명성황후가 굿을 하던 장소로 유명해진 성황당 터라고 하는데, 엄마는 초가 없어서 매일 밤 빈 가방을 메고 그곳에 가서 다른 무당들이 초를 켜고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 초를 거둬다가 신당에 와서 초를 켰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야 엄마는 그때의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웃으면서 미친 짓거리라고 말하지만, 그때 엄마는 다른 사람 몰래 초를 훔치면서 혼자서 너무나도 서글퍼서 그 자리에서 엉엉 대며 울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상황이다. 엄마는 이혼하고 나서 김장사와 술장사, 그리고 보리밥 장사를 하면서 엄마의 지갑에서 돈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왔던 엄마가 고작 초 하나를 살 돈이 없어서 기도터에서 남이 켜다 남은 초를 훔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굿을 떼면 없는 돈을 더 끌어 모아 보태서 악사가 있는 굿판을 열었다. 엄마의 무당 인생에서 엄마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악사'였다. 

 그 덕분에 엄마의 전담 악사가 되었단 김 피리 삼촌은 처음엔 대금 악사로 우리 집에 와서 엄마의 굿판에서 피리 연습을 해서 피리도, 대금도 하는 멀티 악사가 되어 그 이후로 이름이 더욱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는 여자였지만 의리가 있는 여자였다. 그때부터 거래했던 구리 과일 도매시장의 과일집, 그리고 청량리 정육 고깃집이며 떡집 등등도 단 한 번을 바꾸지 않고 끝까지 한 집만 고집하며 팔아주었다.

 무당의 세계에서는 '만신'이라는 말은 '만 명'의 중생들을 먹여 살려라 라는 의미의 단어라고 한다. 나는 내 엄마이지만, 엄마가 그 '만신'의 뜻을 제대로 지키던 사람이라고 감히 자부해 본다.

 엄마가 신 받은 지 3년이 지난 때, 엄마는 한양 12 거리를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대략 90% 이상은 마스터한 한양 굿 마스터리가 되었다. 엄마의 위치는 엄마가 굿을 한참 배울 적에 다른 선생님을 보면서 어쩜 저렇게 굿을 잘할까? 하며 감탄하면서 그 선생님께 배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다른 무당들이 엄마를 보고 어쩜 저 짧은 기간에 굿을 저렇게 배웠을까? 저 사람한테 굿을 배우고 싶다. 이렇게 생각되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다른 선생님들처럼 자신의 문서(무당들이 굿판에서 하는 일종의 주문 같은 성격의 그 무엇)를 감추거나 하려 하지 않고 엄마에게 용기 내어 가르쳐달라고 하는 사람이면, 자신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선뜻 문서를 내어주고 춤사위 하나하나까지 가르쳐줬다고 했다.

" 언니, 언니는 발걸음 떼는 거성 하고 손 하고 따로 놀아. 그러니 먼저 거성부터 눈감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을 한 다음에, 그다음에 춤을 배우자. 문서는 내가 줄 테니까 걱정 말고. "

 엄마의 그때 목표는 엄마만의 목소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양굿의 꽃은 거리거리마다 있는 '창가'에 있다. 무당이 번쩍번쩍 뛰기만 하고 그런 굿이 아니라, 가벼운 뜀박질에 손과 신복으로, 무속 도구로 하는 춤사위, 그리고 거리 중간중간마다 하는 '창'이 있다. 

 엄마는 특히나 스스로 음치라는 걸 알고 있을 만큼 노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그때부터 틈만 나면 노래방을 다녔다. 일단 기본적으로 음치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된 음악적 감각을 키워야 했고, 그다음에는 '창가'를 자신의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을 매일 같이 연습했다.

 누가 보면 굿에 미쳐있다고 할 만큼, 아니 엄마는 정말 굿에 미쳐있는 사람이었다. 허구한 날 틈만 나면 굿 연습, '창가' 연습이었다. 엄마의 제자들은 그런 빡센 엄마만의 트레이닝을 못 버텼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무당이 엄마 자신 정도만큼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다른 사람한테는 엄마만큼 노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신도' 복은 있었으나, 언제나 '신 제자' 복은 1도 없었던 외로운 무당이었다.

 1999년 11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바로 직전의 시기. 그 무렵 엄마는 웬만한 한양굿을 마스터했고, 엄마가 신을 받은 지 대략 3년 정도 만에 남산 '김구 동상' 앞에서 '새 천년을 위한 통일 굿'이라고 현수막을 크게 걸고 한양 12 거리 발표를 했다.

새천년을 위한 통일굿 - 왕룡암


 굿판이 열리는 전 날, 새아빠는 해당 장소에 굿 상을 손수 톱과 나무를 이용해서 만들고 상을 차렸다. 워낙에 큰 굿판이어서 엄마가 아는 사람들은 총동원되었다. 신도들부터 엄마의 바로 윗 언니 내외까지 굿판 도우미로 총동원되었다.

 굿판이 열리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모여들었다. 일반 사람들은 물론 어느 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님, 그 교수님이 데리고 온 어디서 왔는지 모를 외국 교수님, 그리고 특이한 것은 중간중간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녹화를 하러 온 무당들도 상당히 보였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대략 수 천명은 되어 보였다. 아무리 못해도 기본적으로 1천 명 이상은 넘었다.

그 무당들은 엄마의 굿을 녹화를 해서 문서와 엄마의 굿 사위들을 배우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굿이 시작되었고, 수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굿을 한다는 것이 엄마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 하는 하얀 고깔을 쓰고 하는 '불사거리'를 할 때에는 내가 봐도 얼어붙어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엄마는 점점 긴장이 풀렸는지 굿판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날의 꽃 '작두 거리'가 왔다. 엄마의 작두거리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특히 아들인 나는 엄마의 입 속에서 엄마의 입 속을 헤집어 대는 칼날이 혹시나 엄마의 혀와 입을 베어 놓지 않을까? 저 시퍼런 작두 날이 엄마의 발을 베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건 아마도 아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걱정이었다.

 엄마는 작두 날 위로 마치 달리기를 하듯이 쫓아 달려가더니 단박에 칼날 위로 올라갔고, 그 시퍼렇고 무서운 칼날 위에서 번쩍번쩍 뛰어댔다. 내가 봤을 때에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적어도 30cm 이상은 뛰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날 작두 위에서 나라에 대한 예언을 했다.


왕룡암 선생의 비행기 사고 예언 장면


" 조만간 비행기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장군님 수위에서 보살펴 줄 것이야. 걱정하지 마라!! "

 엄마의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이런 내용으로 구경꾼들에게 무언가 선포를 하듯 외쳤다. 그런데 정말로 얼마 가지 않아서 비행기 사고가 났다. 대한항공의 항공기가 추락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화물 편 항공기라서 정말 큰 인사 사고는 아니었다.


왕룡암 선생의 예언 적중 기사 


 그렇게 엄마는 3년 만에 본인만의 한양굿을 완성하였고, 발표했다. 그때 이후로 엄마는 단 얼마 만에 수억이나 되는 빚을 모두 갚았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무당의 세계는 그렇게 아름답고 로맨틱한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엄마의 두 번째 신엄마가 되어준 일명 '최대감' 선생님과 서로 간에 오해가 있어 헤어지게 되었고, 그 후 서로 간에 사제 지간으로 인연은 맺지 않았지만 굿을 잘해서 그냥 선생님으로 모시며 부르게 되었던 조 아무개라는 남자 박수도 있었다.

 그 사람은 엄마의 말로는 남자 치고는 굿을 예쁘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과 몇 개월을 같이 일을 했는데, 굿판에서 손님들이 굿값 이외의 몫으로 내어 놓은 일명 '뒷돈'을 슬쩍하며 자신의 한복 저고리 속으로 쏙 집어넣는 일로 또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와중에 만난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여자 무당이었고, 엄마보다 훨씬 경력이 오래된 선생님이었다. 그 사람의 별호는 '창수 엄마'라는 사람이었는데, 엄마가 굿판에서 그녀를 처음보고 엄마도 또 그 선생님도 서로를 알아보고 껴안고 울며 인사를 나눈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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