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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May 19. 2024

꺼져 이 무당 자식아!!

엄마에게 들은 엄마 이야기


 서울 오산 중학교로 전학을 와서 몇몇 친구들과 꽤나 친해졌다. 그중에서도 내 짝꿍인 신재형이라는 녀석과 친해졌다. 그 녀석은 가수 김현정과 엄정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더랬는데, 나도 그 녀석 때문에 더불어 그 두 가수가 좋아졌던 기억이 난다.

" 와... 넌 온통 김현정, 엄정화구나? 필통에 이... 사진 좀 봐... 와.. 그렇게도 좋으냐? "
" 으.. 으.. 응.... 예... 예... 예쁘잖.. 아. 노... 노래도 자... 잘하고..."

 그 녀석은 말더듬이 꽤나 심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친구 주변에는 늘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 녀석에 대한 동정심 때문인지 아닌 지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으나 처음부터 짝꿍인 그 녀석에게 관심이 갔었고, 친해지게 된 것이다.

 그 녀석은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녀석과 하교를 같이 하는데 그 녀석의 권유에 의해서 집에 같이 갔는데 그 녀석의 집은 그때 당시 43평의 대단히 큰 아파트였다.

 집 안에는 피아노며 바이올린 등이 있었는데, 그 두 가지 모두 그 녀석이 과외로 하는 것들이라고 했다. 지금의 우리 집과는 현저히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내 눈으로 봐도 우리 엄마는 현재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고 있는 사람이지만 빚이 많아 허덕이고 있는 상태였고, 그 녀석의 집안은 알고 보니 외교관 아버지를 두었고, 시시때때로 해외에 나가서 살기도 하는 그런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렇게 그 녀석과 참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수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거의 매번 그 녀석과만 어울려 지낸 것 같았다. 내가 시작(詩作)을 하게 된 것도 그 녀석이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라 그를 따라 하다가 나도 덩달아 좋아지게 되어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녀석 때문에 엉터리지만 시를 써서 무려 용산문학에 실리기도 했었다. 때는 가을이라 '낙엽'이라는 제목의 시이었는데,

'떨어지는 낙엽~ '

 이렇게 시작하는 지금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서 두 번 다시는 펴지 못할 정도의 이상한 시였다. 딴에는 그 시에 내 이야기를 담아본답시고 내가 지내온 과거의 이야기와 더불어 그때의 내 감정을 썼는데, 엄마는 그걸 보고 내게 엄지를 추켜 세우며 말했다.

" 와!! 우리 아들이 이런 재능이 있어? 이거 네가 겪은 일을 시로 표현한 것이구나!! 잘 쓴다~ 우리 아들~ "

 용산 문학잡지에 실렸지, 내 시를 보고 엄마까지 저렇게 날 추켜 세우니까 내가 정말로 시에 대해서 재능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시를 썼다.

" 재형아. 이 시 어때? "
" 음... 다...다 좋은데 너...너무 지...직설적 이...인데? 비...비유를 좀 서...섞으면 조...좋겠어~ "

 난 시를 쓰면 항상 재형이에게 먼저 검사를 맡듯 했고, 재형이도 자기가 쓴 작품을 내게 보여주며 평가 좀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서로 공통점을 찾아갔다. 아니, 이제와 정확히 말하면 재형이와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재형이 처럼 변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았다.

" 우...우리 나... 나중에 10년 뒤 오...오늘 용...용산역에서 보자. "

 지금 누가 들으면 정말 손발이 없어질 멘트였다. 재형이는 내게 그런 약속을 권유했고, 나 역시 그 녀석과 10년 뒤에 꼭 다시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었더랬다.

 나는 엄마가 신을 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엄마의 직업을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어려울 적이면 길거리에서 ' 우리 엄마 무당인데 점 잘 본다'며 손님을 끌고 오기도 했고, 우리 담임 선생님이나 여자 교감선생님한테까지 내 엄마가 무당이라는 것을 자랑하며 엄마에게 점을 보길 권유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형이가 우리 엄마가 무당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난 평소대로 우리 엄마의 직업을 속일 생각은 1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 녀석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단번에 변해버렸다.

 늘 자리 바꾸기를 할 때에도 나와 같이 앉길 원했던 그 녀석이 갑자기 다른 녀석과 자리를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녀석이 변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 재형아! 매점 가자! 피자빵 사줄게~ "

 그러자 재형이는 갑자기 날 개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꺼...꺼져! 너랑은 이..이제 아...안 놀아. 이 무당 자...자식아. "
" 뭐?? "

 처음이었다. 친구들로부터 '무당 자식'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 말이다. 게다가 재형이와 너무 친했던 터라, 그 녀석의 갑자기 변해버린 이 반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단언컨대 '무당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 상심한다거나 창피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내게 1도 없었다.

 내 성격이 그때부터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날  싫다 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단칼에 인연을 끊어버리는 못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나는 재형이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등을 졌다.

" 그래? 놀지 마. 개새끼야. 미친 새끼 지가 잘난 줄 알고 있나 봐. 풉... 넌 그 말이나 제대로 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

AI 상상 이미지


 내가 잘못했는지, 그 녀석이 잘못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나는 어려서부터 직업에는 '귀천'이라는 놈은 없다고 배웠고, 저 녀석은 그걸 못 배웠거나, 배운 걸 잊어버렸거나, 배운 걸 무시하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때 이후로 새 학년이 올라갈 무렵, 그 못 된 말더듬이 녀석은 아버지를 따라서 해외로 유학을 가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 언니!! "
" 와... 세상 참 좁다... 에그... 결국 신을 받았구나? "
" 응. 나 아직도 기억나. 그때 언니가 나한테 우리네 팔자라고 했던 말.... 언니 정말 용하다.. 용해. "

 엄마가 선생님으로 부른 그 사람은 바로 엄마가 신을 받기 전, 화장품 방판원이었던 엄마에게 '우리네 팔자'라고 그랬던 무당 언니였다. 그 창수엄마라는 언니는 청배(자신의 굿이 아닌 남의 굿판에 돈을 받고 불려 나가것을 전문으로 업을 삼는 무당) 선생이라고 했다. 그것도 청배선생님들 중에서도 S급으로 평가받는 그런 청배선생님이라고 했다.

 아마도 엄마는 그녀를 통해서 한양굿을 보는 눈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 이후로 몇 번을 불렀을 뿐, 그 창수 엄마라는 언니와는 더 이상 인연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으나 지금에 와서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특히 돈이 오가는 사이에서는 친분이 있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고도 한참이 지나서 엄마는 내게 아주 간혹 가다 엄마의 굿판을 구경하는 것도 허락했다. 엄마는 그 어려운 와중에도 일 년에 두어 번씩 '진작굿'이라는 것을 했는데, '진작굿'이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님에게 감사의 의미로 술잔을 올린다는 의미의 '임금님께 진상하다(進上)의 진()과 술잔을 의미하는 작(爵)을 합쳐 '진작굿'이라고 한다.

 엄마가 하는 그 진작굿에는 항상 나를 세워놓고 굿을 하시기도 했다. 나 역시 음악적 감각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굿을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한양굿판에서 장구를 치는 법이라던가 제금(심벌즈 같이 생긴 국악기)을 치는 법이라던가 하는 것이 내 눈에 쉽게 들어왔고 엄마의 허락 하에 그 어른들 앞에서 장구를 쳤더니 대단하다며 칭찬까지 들었었다.

 엄마가 신을 받고 나서 4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하루가 멀다 않고 매일 같이 점보는 손님에, 굿판을 다니던 엄마가 갑자기 1주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 할매! 엄마 도대체 어디 갔어? 장기 출장 굿을 갔나?? "
" 글쎄다. 나한테도 말도 안 하던데? 기도 하러 갔겠지. "

 글쎄... 엄마의 기도는 여타의 무당들처럼 며칠씩이나 걸리고 그랬던 적은 없었다. 항상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를 다니면서도 길어야 3일이 지나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 어떤 무당들 보면 일주일씩, 열흘씩 기도를 다니는 인간들이 있어. 니들은 그 따위 짓거리하지 마라.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없고 *허주만 잔뜩 끼인다. "

* 허주 : [명사] 무당이 될(된) 사람에게 씌는 허깨비. 또는 잡귀.

 그래왔던 사람이다. 그건 나도 얼핏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1주일이나 기도를 떠날 리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온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나는 엄마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살림집에 있다가 건너편 신당으로 잽싸게 건너갔다. 아마 그때부터였나 보다, 엄마는 어린 내게도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내게 숨김없이 이야기를 하고 공개했다.

" 엄마! 며칠 동안 어딜 그렇게 갔다 왔어? "
" 응... 앉아 봐. "

 엄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으라기에 어리둥절하여 일단 엄마의 말대로 엄마 앞에 앉았다. 그랬더니 엄마가 또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여행 갔다 왔어. "
" 여행?? 기도 아니고 여행?? "
" 응. 여행. 한숨 좀 돌리려고. "
" 응?? "

 나는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있었더니 엄마가 드디어 엄마의 여행에 숨겨진 의미를 이야길 했다.

" 그 의정부 때 그 사기꾼 알지? "
" 아... 왜 몰라! 난 그 여자 이름까지 기억하는데? "
" 그 년 때문에 진 빚을 며칠 전에 싹 다 갚았어. 이제 우리 집에 빚은 없어. "
" 왓!! 정말??? "
" 응. 그래. 우리 아들도 고생 많았어~ "

 하면서 엄마는 울면서 날 껴안았다. 사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를 다니는 데도 '공납급'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그 '공납금' 낼 돈도 어려운 것 같아서 내가 담임 선생님께 상담 신청을 했고, 담임 선생님은 나 같은 계층의 학생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소개해주셔서 무료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날더러 고생했다며 날 끌어안고 울기까지 했다. 엄마는 빚을 다 갚고 말 그대로 여태까지 불도저처럼 달려왔던 것에 대한 '스스로의 상'인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제 평화로운 나날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런 평화를 누가 시기라도 한 듯이 또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 우당당탕! 와그작! 쨍그랑! 쾅! 쿵쾅쿵쾅!! '

 어느 날 신당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 또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려왔다. 그리고 신당 밖으로 누군가 자신의 분에 못 이겨 씩씩 대면서 나오더니 돌아갔다.

 나는 놀라서 신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엄마는 신당을 바라보며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고, 신당에 있던 불상이며 촛대, 항아리 등등이 깨져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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