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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Jun 24. 2024

내게 찾아온 방언기도

난 언제나 능력 있는 사람의 편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끔 아빠가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로 찾아와서 보고 가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빠가 찾아와서 오랜만에 아빠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기도 했지만 아빠가 오면 다만 몇 만 원씩이라도 용돈을 주니까 그게 좋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서는 엄마가 아빠한테 잠깐씩 다녀오고 싶으면 다녀와도 된다는 말에 명절이면 한 번씩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인천 구월동 모래내 시장으로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그럴 때면 엄마는 항상 내 손에 돈봉투를 쥐어주고 보냈더랬다.


 그렇게 다니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 망할 큰고모년과 대판 싸우게 되었고 그 싸움에 이어서 할머니 하고도 싸우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난 내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뻔히 들었던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흥분한 상태에서 할머니한테 이렇게 이야기했다.


" 할머니! 내가 태어나고 솔직히 좋아하긴 한 적 있어요?? "


 할머니는 내가 그렇게 대놓고 말하자 적잖이 놀라신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서 할머니가 내게 한 만행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거니 생각되었다. 사실 나로서는 어떤 말이 진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할머니가 갓난아이였던 나를 들고 뜨거운 물을 부어버리려고 했던 것이 맞는지, 아니면 지금의 할머니가 나한테 하는 것처럼 다른 손주들을 귀여워하고 예뻐해 주듯 하는 저 행동이 진실된 행동인 지는 나로서는 구분할 재간이 없었지만, 방금 그 표정에서 어쭙잖게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나는 엄마 손에서 키워졌고, 엄마가 조금 과장되게 표현을 했다고 하더라도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 즉 외할머니나 이런 분들이 내게 해준 말도 있었으니 100%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혼을 한지도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엄마와 아빠네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무당으로서, 한 여인으로서, 한 엄마로서 방송에 출연 결심을 하고 처음 찍었던 '대찬인생'이라는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이 화근이었다. 엄마는 그 프로그램에서 아빠를 파렴치한 성폭행범으로 만들었다. 내가 객관적으로 놓고 봐도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아빠를 전부 성폭행범으로 생각을 할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녹화하는 내내 그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리고 마침 방송을 타고나서 곧바로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 뭐가 거짓말인데!! 네가 날 납치했잖아!! 난 있는 그로 말했어!! 도대체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


 하고 엄마와 아빠가 전화통화로 엄청난 싸움을 벌인 것이다. 나는 그런 통화를 하는 엄마를 옆에서 보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나는 정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러고 아니나 다를까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나한테로 전화가 왔다.


- 너네 엄마한테 전해!! 내가 고발할 거야!!


 그 짧은 순간에 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여기서 엄마의 편을 들까? 아빠를 위로를 해야 하나? 그런데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아빠는 다른 여자에게 미쳐서 날 버린 사람이고, 50살이 넘어서도 돈이 없어서 빌빌 거리고 사는 능력 없고 한심한 사람이었다.


" 왜 나한테 그러는데!! 내가 그랬어? 엄마랑 아빠랑 둘이서 해결해!! 왜 나한테 그러냐고!! "
- 야! 네 엄마 말대로 하면 넌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넌 강간해서 낳은 아들이 되는 거야!!


 난 아직도 그 말이 내 뇌릿속에 콱! 박혀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들한테 할 소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열받아서 차마 욕은 못했지만 아빠에게 한 껏 퍼부어 대고 전화를 끊었다.


 내 선택은 어렸을 때에나 성인이 된 때에나 엄마였다. 엄마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엄마가 선택한 인생일 뿐, 내가 아들이라고 해서 대신 감당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다. 이건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엄마가 내게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했을 때도 똑같이 생각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아빠는 너무나 능력이 없었다. 몇 년 전, 개인택시를 하고 싶은데 돈 3천만 원이 없어서 이혼한 전 와이프에게 돈 좀 해주면 안 되겠냐고 구걸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건 진실이어도 진실이어야 하며 거짓이어도 진실 이어야 한다. 내가 나를 평가해도 나는 너무 냉정했다, 난 늘 무능력한 아빠보다 능력 있고 돈 많은 엄마 편이었다.


 국회에서 예배를 하기로 한 우리 학교는 행사 준비로 한창 바빴다. 수업이 끝나면 전교생을 모아서 예배를 드린 후에 또 할 것이 생겼다. 그건 바로 국회에서 공연할 노래와 율동이었다.
 

 언제나 음악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바로 내게 빌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다. 그 선생님은 나를 앉혀놓고 늘 이런 말을 했다.


" 저는 김 선생님이 언젠가는 저처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해요. "


 도대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무리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해도 국문과에 국어교육과 출신이었는데 그 소린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암튼 그 선생님은 내가 이 대안학교에 들어와서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교감으로 승진을 했다. 그 교감선생님이 예배가 끝나면 아이들을 모아놓고 노래와 율동을 연습시켰다.


 선정된 노래는 가수 박학기의 '아름다운 세상'. 노랫말이 좋거니와 멜로디가 좋은 노래인데, 거기에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바로 국회의 구성원들을 전부 크리스천으로 바꿔야 그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교직생활과 점점 동떨어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종교단체의 대안학교라지만, 이 학교에서 하는 일은, 아니 이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추진하는 일은 전부 이상하게만 느껴졌고 날이 가면 갈수록 정이 떨어져 갔다. 그래도 그나마 아이들 때문에 버텼는데 그런 마음조차도 점점 사라져 감을 느낄 수 있었을 정도였다.

 
 나는 정말 국회에서 이 학교 교장선생님이 진행하는 예배는 정말 참여하기 싫었다. 하지만 빠질 명분이 없었는데, 마침 회의 끝에 교장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 이번에도 우리 김 선생이 사진 잘 찍어줘요. "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저들처럼 미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내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 예! 걱정 마세요. "


 그리고 정말로 국회의사당 어떤 한 건물에 도착을 했고, 우리는 예배 준비로 너무나 바빴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예배. 처음엔 귀빈이랍시고 온갖 국회의원들과 관련자들의 인사와 대표 기도가 있더니, 우리 아이들의 공연이 있었고, 교감 선생님의 지휘로 CCM을 불렀다. 노래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그 노래 몇 곡으로 거기 있는 사람들 전부를 흥분케 했고 단결시켰다. 전부 하나 같이 양손을 위로 뻗쳐 들고 노래를 부르고, 미친 사람들처럼 기도를 했다.


 교장선생님도, 교감 선생님도 얼마나 흥분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지 또 방언기도를 하면서 미친 기도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이라이트인 교장선생님의 설교가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무대에 나가 마이크를 들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이미 사람들은 흥분을 한 상태라서 교장 선생님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국회를 크리스천으로 채우고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호응을 하며 연신 " 아멘!! 아멘!! "을 외쳐댔다.


 그뿐인가? 마지막에는 아이들이 이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이라며 단상에 올라오게 한 다음 무릎을 꿇게 하더니 한 명 한 명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사진을 찍어 대다가 그 아이들의 표정을 봤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재미라도 있다는 듯이, 교장 선생님이 하는 저 말이 무조건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듯이 반응했고, 교장 선생님의 그 안수 기도에 하나 같이 감동을 받은 표정들이었다.


 그런 표정의 아이들을 보고, 또 무대 아래에서 자신의 자녀들이 무릎을 꿇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들을 보고 학을 뗄 정도였다.


 그 학교에서 하는 이런 이상한 행사는 국회에서가 끝이 아니었다. 학교는 이번 국회에서의 행사로 탄력을 받았다. 대대적으로 기독교를 기본으로 하는 국민일보에도 보도가 될 정도였다. 이 대안학교가 15주년을 맞이하여 국회에서 성공적인 예배를 끝마쳤다고 광고하듯 보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교장 선생님은 이곳저곳에서 강연 초청을 받아 행사에 불려 나가기 바빴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나갔다 올 때마다 우리 대안학교의 학생들이 한 두 명씩 늘어 갔다.


" 너 뜨레스 디아스라고 알아? "
" 뜨레스 디아스?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


 나는 모태 신앙인 여자친구에게 물어봤다. 뜨레스 디아스는 한국말로 하면 사랑의 동산이라고 한마디로 대략 3박 4일 정도로 어느 기도를 할 수 있는 시설에 들어가서 영성훈련을 하는 행사다.


 잘은 모르지만 교감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랑의 동산도 무슨 '기수' 같은 것이 있어서 사랑의 동산 몇 기라고 하면 같은 크리스천들은 다 알아듣고 공감 내지는 대단하게 느끼기까지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이번에도 그 사랑의 동산에 끌려갔다. 월 127만 원을 받고 말이다. 그곳에 갔더니 예배와 노래 그리고 율동, 성경 말씀 공부 등등으로 갖가지 이벤트로 행사를 했는데, 이번엔 찍사가 아닌 참여자로 갔기 때문에 꼼짝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기가 막히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날마다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강단에 서서 강연과 간증을 하는데, 참 간증은 자기가 살면서 하나님과 관련되어 겪은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더라 라는 내용으로 발표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전부 '신기하다. 대단하다. 아멘! ' 이런 식의 반응으로 화답한다.


 그렇게 간증을 하러 오신 손님들 중에 강원도에서 한 교회의 장로를 하고 있다는 노 신사가 오셔서 강단에 스셨다.


".... 그런데 그 교회를 새로 건축하게 된 것이었어요. "


 그 장로님의 간증은 이랬다. 강원도에 어떤 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가 새로 건물을 지으며 건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그 교회에 건축헌금으로 자그마치 5억을 때려 넣으셨다는 것이다.


" 아무리 그래도. 전 재산을 건축헌금으로 받쳤으니 아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죠. 안 그래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어머니가 이미 그렇게 하셨는 걸. 그리고 저는 왠지 그걸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


 거기까지 듣고는 나는 속으로 저 아저씨도 참 인생이 고달프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장로님이 뒤 이어 하는 말이 더 기가 막혔다.


" 아!! 그래서.... 이러 이렇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그 5억에 더 보태서 10억으로 채워주시더라 이겁니다. "
" 하!~ 아멘!! 어쩜 그래... 아멘!! "


 순간 미친 건가? 생각이 들었다. 저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아멘 아멘 그러면서 감동받을 일인가? 하고 말이다. 내게는 저 간증의 목적이 뻔히 보였다. 자기 어머니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이 2배로 채워주시더라.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이 뻔히 답이 보이는 말에 사람들은 공감을 하며 그 장로님의 간증에 "아멘, 아멘. " 거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저 한심하다라고 생각이 된다기보다는 지금 이 집단이 너무나 무서웠다.


 내가 무섭게 느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 스스로에게 무서움을 느꼈다. 한 차례 교육이 끝나고 조별로 모여서 기도 모임을 가졌는데, 거기에서도 어김없이 노래로 시작되었다.


 나는 워낙에 노래를 좋아하고, 또 CCM의 멜로디 자체가 나를 쉽게 흥분케 했다. 그렇게 노래를 같이 따라 부르며 흥분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했는데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 입에서 갑자기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처럼 요상한 말이 나오려고 그러는 것이다. 분명 그건 내가 생각했을 때에는 빙의다. 그래서 무서움을 느꼈다. 내게 귀신이라도 씐 것 같이 느껴져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 기도를 멈추고 입을 떼지 않고 가만히... 그저 가만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쉬는 시간에 나는 방금 겪은 것에 충격을 먹었다. 며칠 전 엄마의 말대로 내가 빠진 것인가? 하고 엉뚱한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 사랑의 동산이 끝나고 나서 나는 빨리 이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이 학교에 정이 가질 않았다. 아이들이고 뭐고 간에 이 이상한 집단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교사로서의 아주 작은 양심과 신념이 있었다. 담임인 내가 중간에 이렇게 관두게 되면 내가 맡은 저 아이들은 부모 잃은 고아처럼 되는 것이었다. 이 학교를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95%였다면, 그 작은 5%가 날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 우리 교장 선생님은 또 다른 이상한 일을 벌이려고 폼 잡고 있었다. 그건 한 달에 한 번 있는 페어런츠데이에 확연히 알 수 있었다.


" 이게 바로 공주 크리스천 마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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