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직장일기03
OPIc 시험을 다시 봤습니다. 하반기 공채를 위해서였는 데요. 이번에도 급하게 접수를 해서, 공부는 거의 안 하고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일을 때려치운 지 1년이 넘었는데 항상 공부를 못 한 채로 시험을 치는 거로 봐서 그냥 노력 부족인 것 같다는 생각에 반성했습니다. 물론 마음속으로 만요. 뭔가 아직 행동이 새롭게 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반성이 아니라 그냥 저 자신의 한심함에 괴로워하는 정도겠지만, 죄책감이 저 자신을 갉아먹긴 해도, 채찍질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생각만 합니다. 그게 문제겠지요?
공부는 딱 이틀 정도 하고 간 것 같습니다. 사두었던 책이 AL을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저번에 시험을 치고 ‘나 따위가 무슨 AL이야’ 하며 쉽게 설명된 초보자용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치기 4시간 정도 전에 근처에 도착해 널찍한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와 뇌를 돌리기 위한 당분 공급용의 초콜릿 타르트를 먹으며 연습했습니다. 요즘 수면시간이 일정치 않은 데다 오랜만에 외출했더니 공황 증세가 와서 안정제를 먹고 많이 졸린 상태로 시험장에 갔습니다.
OPIc 시험을 치러 센터로 갔는데,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다시 봐도 정말 환경이 열악합니다. 토익처럼 학교를 빌려서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좁은 공간은 아니지만 뭔가 계속 갖추다 보니 좁아져 버린 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뭐 그냥 인터넷만 잘 되면 그만이겠지만요. 늦은 저녁 시간에 방문했더니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저보다 3,4살씩은 어려 보이는 친구들이었고요. 뭔가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들고 와서 친구들과 함께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제가 다시 한 번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ㅋㅋ
직전에 방문했을 땐 응시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만약 OPIc 시험을 칠 분이라면 최대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때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센터마다 환경이 다르겠지만, 응시자 간의 간격이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 컴퓨터 교실보다 좁았습니다. 헤드셋 같은 경우에도 차폐되는 것이 아니므로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다 들려요. 특히 내가 생각한다고 잠깐 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게 들리는데, 이게 올곧은 정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직전에 진정제를 먹고 응시하러 갔기 때문인지, 요즘 상태가 조금 나아져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열리지 않고, 손도 많이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정제를 먹고 응시하러 갔기 때문인지, 머릿속에는 ‘나도 핫도그 설탕 발라서 먹어보고 싶다.’ 등과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 요즘 단 거 너무 먹고 싶어 하는데 빨리 죽으려고 그러나.’라는 생각도 들었네요.
서베이에서 선택한 항목 중 3가지, 돌발 주제가 1가지 나왔습니다. 준비했던 부분이 조깅하는 거 걸어 다니기, 공원 가기 이런 것들을 주로 연습했는데, 묘사 문제 (더 자세하게 영문으로 뭘 물어봤는지 적을 수 있는데 적으면 문제 유출로 잡혀갈 것 같습니다) 가 여러 개 나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는 단어들도 싹 다 까먹고, 아는 표현들도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고요. 평소 제 영어 실력은 여행지에 가서 “어떻게 가면 될까요? 여기로 가는 표를 사고 싶어요.” 정도의 실력은 됩니다. 그것도 머릿속에서 약간 생각을 한 후 말을 하는데, 이런 일상적인 주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평소에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대화하는 사람이 아니면 힘들겠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에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ㅋㅋ 세상 어느 그 누가 ‘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 이걸 영어로 한번 말해볼까? ‘라고 하겠습니까. 더듬더듬 되도록 문장은 끝냈고, 그 상황에서 제가 신경을 겨우 쓴 건 시제 맞춰 이야기하는 정도였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문장을 이야기하지도 못했어요. 시험장에서 나와서 ’와 망했는걸. 입사원서 못 넣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5일 시험 결과를 확인해 보니
아니, 제가 IH 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변 소음이 많아서 당연히 다른 분들이 더 잘하실 거로 생각했거든요. 저같이 단어 하나하나 생각해가며 천천히 말해서는 IM도 못 받을 줄 알았어요. 어떤 기준으로 점수가 매겨지는지 알 수 없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 더 받고 정밀 분석 신청란이 있는 이유가 있군요. 점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ㅋㅋㅋㅋㅋ 예? 제가요?를 시험 점수를 확인하고 나서 몇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외쳤습니다. 말 한 것에 비해 좋은 점수가 나온 요인으로는 1. 문장은 끝내려고 했다(문장 같지도 않았는데) 2. 모든 문제에 대답했다. 3. 시제는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잘 됐는지는 모름)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점수가 잘 나와줘서 다행히 입사원서는 적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영어 성적이 아직 없어서…. 같은 핑계는 댈 수 없습니다. 점수는 시험장의 상황에서 말 꺼내기가 쉽지 않음이 참작되는 것 같습니다. 저같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들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잘 응시할 수 있는 시험입니다. 점수를 위해서 따로 공부하는 분들이시라면, 저보다 더 잘해내셨으면 내셨지, 못하시진 않으실 겁니다. 사실 공부를 하시는 이유는 조금 더 적게 공부를 하고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함이 큰 시험인 것 같습니다.
책을 펼쳐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책 안의 나는 너무나 쾌활하고, 외향적이며, 활동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묘사나 표현을 하기 위해선 긍정적인 단어들을 아무래도 많이 배우고, 긍정적일 때 활동에 대한 단어들을 함께 붙여 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4시간 동안 카페에서 적어본 의기소침하고, 내성적이며, 우울하기 그지없는 문장들을 밑에 첨부합니다. 문법에 맞는 문장도 아닐 것이고, 그냥 제가 이렇게 쓸 줄 아는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가졌구나, 정도로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적힌 것의 7%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