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통주 이야기 옮겨오기-45
압생트는 되고, 과하주는 안 되는 이유
띠링, 띠링. 휴대전화 알람이 울린다. 에스엔에스에서 지난해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의 역사를 알려준다. 지난해 봄, 수입 주류 유통사가 연 신제품 시음회에 참석했다. 다양한 술을 시음하면서 전통주가 떠올랐다. 원료나 제조 방법이 다른 외국 술을 마시면서 전통주가 연상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고대 문헌을 통해 추측만 할 뿐이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 등의 신화에 술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술이 얼마나 인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문명과 함께 발달한 술은 중세에 큰 변화를 맞는다. 증류법이 발명되면서다. 발효주는 증류법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맛과 향을 지닌 술로 변신했다. 전쟁과 무역의 활성화 때문에 술의 다양한 재료 사용법과 증류주 제조법이 전 세계로 퍼졌다.
우리나라도 여러 경로로 증류주 제조법이 들어 왔다. 안동과 평양을 중심으로 증류주가 생산됐다. 다른 형태의 술도 탄생했다. 대표적인 술이 과하주(過夏酒)이다. 지날 과(過), 여름 하(夏), 술 주(酒). 이름 그대로 온도와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 술이 상하는 것을 극복하는 데 목적을 둔 술이다. 발효 술에 증류주를 혼합해서 20도를 넘는 술로 만들면, 술의 단맛이 유지되면서 상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제조법의 술이 외국에도 있다. 발효 중에 브랜디를 첨가해 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주정강화 와인들이다. 포르투갈 포트와인과 스페인 셰리와인이 대표적이다. 둘 다 와인에 증류주를 추가해 저장성을 높였다. 과하주는 쌀을, 포트와인은 포도를 원료로 한다. 원료는 다르지만, 둘 다 단맛이 강해 알코올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은 두 술 모두 비슷하다. 포트와인을 마실 때는 과하주가, 과하주를 마실 때는 포트와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쑥과 노간주 열매처럼 풍미가 비슷한 부재료를 사용한 전통주와 외국 술도 있다. 프랑스 압생트와 전통주 애주(艾酒·쑥 발효주)가 쑥을 사용한 대표적인 경우다. 압생트는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술이다. 증류주로 알코올 도수가 높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했다. 애주는 1540년 무렵 발간된 전통 조리서 <수운잡방>에 기록되어 있는, 쑥을 넣어 만든 발효주이다. 아쉽지만 현재 애주를 판매하는 곳은 없고 가양주 형태로만 있다. 발효주와 증류주라는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부재료를 넣어 만든 이 두 술은 쑥 향을 느낄 수 있다. 압생트의 향기를 맡고 있으면 애주의 쑥 향기가 생각난다.
노간주 열매(주니퍼 베리)를 넣어 만든 대표적인 술은 진(gin)이다. 진은 호밀 등의 원료를 증류해서 노간주나무 열매로 소나무 향(테르펜)을 낸 술이다. 다양한 칵테일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우리에겐 비슷한 향이 나는 술로 송순주(松荀酒)가 있다. 봄날 소나무 순이 연초록으로 올라오면 그 마디를 끊어서 송순을 만든다. 보통은 곡물 발효주에 솔잎과 송순을 넣어 만든다. 처음 진을 마셨을 때 송순주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송순주를 잘 이용한다면 진과 비슷한 술을 개발하거나 칵테일 원료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 제조법의 이동을 보면 세상에 비슷한 맛과 향을 가진 술이 존재하는 데는 우연보단 필연이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과하주가 포트와인이나 셰리와인과 견주어서 결코 맛이 떨어지지 않는 데도 사람들은 과하주를 알지 못한다. 압생트는 들어봤어도 애주는 들어보지 못했고, 진은 마셔봤어도 송순주는 모른다.
과거에 견줘 전통주의 맛과 품질이 좋아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외국 술의 가치는 높게 평가하면서도 전통주는 낮게 본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우리를 높게 평가하는 외국이 많다. 우리의 자부심도 올라가고 있다. 이제 전통주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우리 술에 자신감을 가져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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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4월30일자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