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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외국인이 바라본 조선인의 술 문화와 풍경

우리술 자료 펼치기(옛 신문을 중심으로..)-25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로 항상 상위에 랭크되기도 했으며 사회적인 문제도 많았다. 지금은 덜 하지만 우리나라 음주문화 하면 폭탄주와 함께 술을 강요 하는 문화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다음으로 폭음, 회차 문화도 빠질 수가 없으며 술잔 돌리기도 그 뒤를 따른다. 폭음 문화는 음주 분위기를 화기애애하는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는 문화를 말한다. 폭음 문화의 다른 예가 '원샷' 강요이다. 한번 잔을 들면 모두가 잔의 바닥까지 의무적으로 비워야 하고 따라서 컨디션에 맞추어 적당히 양을 조절해가며 마시지 못한다. 다행히 최근에는 혼술, 홈술 등의 음주문화 변화, 사회인식 변화와 자성의 목소리 등으로 그 분위기가 변하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대표 술 문화, 폭탄주 / 출처-픽사베이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폭탄주나 폭음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폭탄주의 경우 조선의 혼돈주(막걸리에 증류식 소주를 섞은 것)가 폭탄주의 시초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혼돈주는 마시는 방법의 기록이기에 그 자체가 일반적인 문화라 이야기 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현대 폭탄주의 유래는 알 수 없다. 20세기 초 가난한 미국의 부두 노동자들이 적은 돈으로 빨리 취하기 위해 싸구려 위스키와 맥주를 혼합해 마신 게 시초라고도 하고, 같은 시대 러시아의 벌목공들이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것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는 1983년 강원도의 군, 검찰, 안기부, 경찰 등의 지역 기관장 모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마셨고 이후 널리 퍼졌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무엇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싼값으로 빨리 술에 취하려던 문화였던건 틀림없는 것 같다.


유럽에도 폭탄주 문화는 있다 / 출처-픽사베이


 폭음 문화가 전통적인 한국의 음주 문화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과거에는 풍류로서 술을 가까이하고 계절마다 술을 담고 적당히 즐기는 음주 문화를 가졌다. 술을 마시는 것을 조심하기 위해 ‘향음주례(향촌의 선비나 유생들이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主賓)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는 잔치)를 통해 술 마시는 예를 갖췄다. 하지만 이러한 풍류 문화와 함께 폭음 문화는 조선 말기에도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향음주례 재현 행사를 한다 / 출처-업체홈페이지


  조선 말기인 개화기 술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인물로 외국 선교사나 여행가가 있을 것이다. 선교사에게 조선은 포교를 할 곳이었으며 여행가에게 새로운 미지의 세계였다. 물론 그들의 시선은 유럽인의 시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의 술 문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1)에서는 “그들은 일반적으로 술에만 의존하며,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술을 마셔서 술에 빠져 버린다고” 하였다.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2)에서는 “그들은 독주를 즐기며 식사 때에도 폭음을 한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은 틈만 나면 술자리를 만들며 매우 무절제하다 ‘고 하였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3)에서도 ”지체가 높은 사람들조차도 잔치 끝에는 술에 취해 마루에 구르기도 “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투의 나라 / 출처-홈페이지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은 모두 폭음가였던 모양이다.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양주를 처음 마셔 보는 사람들도 놀랄 만한 주량을 보였음에 놀라워하고 있다.


 “만일 우리 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가 양주를 다 내놓을 수만 있었다면 매일 수백 명의 술주정꾼들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전에 양주를 마셔 보지도 않았지만 놀랄 만한 주량을 보였다. 한 예로 우리를 방문한 한 관리가 그의 세 명의 수하들은 불과 반 시간만에 샴페인 네 병과 체리브랜디 네 병 을 비웠다.”


구한말 양주처럼 보이는 병을 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프랑스 선교사 중 다블뤼(4)와 프티니콜라의 시선을 기록한 것은 다음과 같다. “폭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습관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폭음에 대해서 프티니콜라는 과도한 음주 습관 때문에 국가 재정이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조선에서는 쌀로만 술을 빚기 때문에 곡물 낭비가 심해져서 물가 상승의 용인이 된다고 지적하였다.(5)”


마리니 콜라 앙투안 다블뤼-조선교구장


  다블뤼의 글을 정리한 책(6)에서도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의정이나 임금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 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을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처럼 조선에 온 선교사들 및 여행가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술 문화는 많이 마시는 그리고 무절제한 모습으로 비쳤다. 선교사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개인의 입장이다. 조선인의 성격이나 사고방식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이 많았다. 이것은 유럽 천주교회의 엄숙 주의적인 신앙관에서 나온 판단이 동시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럼, 개화기 서양인들 눈에 비친 술은 어떤 종류가 있었고 그 맛은 어떠하였을까?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는 ‘조선의 술은 수수 등의 곡식을 빚어 만들며 일본의 사케(sake)와 비슷하며 맛이 없고 탄 냄새를 풍긴다’고 하였다.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7)에서도 ‘토속 음료수로는 술이 있는데, 술 냄새가 고약하다. 연기와 알코올과 등잔 기름 냄새가 한꺼번에 난다’고 하였다.


구한말 주막에서 한잔하는 사람의 사진엽서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술은 외형상 버터밀크를 닮은 매우 감칠맛이 도는 하얀 음료에부터 매우 순하고 물로 희석된 강한 냄새와 타는 듯 독한 맛의 화주(火酒)까지 다양하다. 이 중간에 보통의 곡주가 있는데 약간 노란 듯한 일본의 정종과 중국의 삼수(samshu)와 유사한 것으로서 다소 역겨운 냄새와 맛을 지닌다. 그것들은 다소 강하게 연기 비슷한 물보라와 기름,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데 그중 가장 좋다는 것에도 푸젤유가 남아있다. 술은 쌀이나 기장과 보리로 빚는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831~1904) 여사


  조선의 술은 쌀이나 잡곡으로 빚는데 순한 막걸리에서부터 독한 증류주까지 매우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탄 냄새가 나며 맛이 없다고 평하는 것을 보면 조선술이 서양인들에겐 별다른 매력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국술 중에 어떠한 술은 좋아했을까? 「금단의 나라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특히 양주나 독주가 수중에 들어오면 폭음을 한다. 그들은 샴페인과 체리 브랜디를 선호하며 그 외에 백포도주와 브랜디 그리고 여러 종류의 독주들도 좋아한다. 반면에 적포도주는 떫은맛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구한말로 추측되는 술 마시는 사진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당시 외국산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일부 부유층과 상류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는 당시 일부 부유층 사이에서 외국 술이 유행하였음을 기록한다.


 “프랑스제 시계와 독일제 도금품에 대한 기호와 더불어 외제 술에 대한 애호가 젊은 양반들 사이에서 다소간 유행이 되어 가고 있었고 이를 기꺼이 제공하는 사람들은 퓨젤유가 풍부한 감자 주정을 ‘오래된 코냑’이라고 내놓기도 하는데 거품이 일어나는 샴페인 한 병은 1실링에 살 수 있다.”



1883년 12월 20일 한성순보 海關稅則(해관세칙)을 보면 샴페인과 위스키에 수입 관세를 매겼다.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그럼 조선인들이 폭음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는 ‘아마도 조선 사람들이 술고래인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대도시일지라도 차를 거의 마시지 않는 것이며 사치스러운 청량음료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상투의 나라」에서도 ‘조선 사람들은 일본이나 청국에서처럼 차를 재배하지 않으며, 가장 부유한 사람조차도 최근에야 비로소 차나 커피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으며 평민들은 너무 가난해서 차를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결코 우유를 마시지 않으므로 연회를 벌이는 경우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무해한 음료수가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 살다」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차나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것을 본 적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 사람들이 폭음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술 이외의 음료문화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서양인들은 분석하고 있다(8).


  지금 우리의 음주 문화가 조선시대부터 연결된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시의 사회와 지금의 사회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조선 이후 우리는 엄청난 사회, 문화적 변화를 겪어 왔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대화 속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마시는 음주 문화를 당연하게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그러한 음주 문화를 좋아하지도 않고 폭음이라는 부분은 결코 장려되어서는 안 될 문화일 것이다.


  코로나 19 이후에는 또 다른 음주 문화가 생겨 날것이다. 이러한 변화하는 세상에 우리의 음주 문화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 거기에 우리 전통주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폭음이 우리의 술 문화는 아닌 것이다. / 출처-픽사베이




* 많은 내용 "근대 한식의 풍경"(한식재단)에서 참고 및 인용 했습니다.


(1) 1904년 선교의사로 조선에 파견된 릴리어스 홀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M.D.)가 저술한 것으로 조선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며 기술한 책


(2) 여행가이자 인종학자인 오페르트 우리에게는 남연군 묘를 도굴한 서양인으로 잘 알려짐. 1866년 2월 흑산도 주변, 2차 1866년 6월 덕적도를 거쳐 강화도, 1868년 4월 남연군 무덤을 발굴 하려다 실패 하는 등 조선을 3번 방한해서 낸 책


(3) 1897년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대표적인 기행문이며 조선 사회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서


(4)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1866. 3. 7 ~ 3. 30, 한국명 안돈이, France)주교

1841년 12월 18일 서품. 1845년 10월 조선 입국. 1857년 3월 25일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성성식을 가졌고, 1866년 3월 7일 교구장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함. 1968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 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순교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5)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인식과 문명관 / 김가람, 한국교회사연구소


(6) 문명과 야만 / 조현범


(7) 에밀 부르다레 Emile Bourdaret. 프랑스 고고학자. 한국에 관한 저술로서 프랑스인들이 애독했던 이 책을 남기고 수수께끼처럼 사라졌다. 오리엔트와 동남아, 일본 등지에서 폭넓은 조사활동을 펼쳤고, 우리나라 북방고인돌에 대한 논문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을 두 차례, 4년간 체류하면서, 프랑스 철도와 광산 개발에 관련된 기술자문, 프랑스어학교 등에서 일하는 가운데 이 책을 집필


(8) 근대 한식의 풍경 / 한식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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