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와인을 마셨을까?

우리술 신문 펼치기(옛 신문을 보며..)-4

  개인적으로 최근 한국와인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다. 과거에 한국와인(포도, 머루, 복분자 등)은 품질이 좋지 않았기에 외국 와인과의 경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와인은 좋은 품종이 나오고 발효방법도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품질의 향상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와인에 대해 우리 조상은 언제부터 알게 되었고 마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역사책을 찾아보았다.


   처음 포도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조선시대 편찬된 『고려사』이다. 고려 충렬왕 11년(1285) 8월 28일(음력), "원 황제(쿠빌라이 칸)가 고려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하다(元卿等還自元, 帝賜王蒲萄酒)"라 적힌 기록이 포도주에 관련한 공식적인 첫 기록으로 보인다. 포도주가 원나라에서 제조된 것인지, 실크로드를 타고 온 유럽의 포도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에도 충렬왕 28년, 34년 쭉 포도주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고려사


  또한 고려시대의 왕실 학자로서 1324년 원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한 안축(安軸·1282~1348년) 은 투루판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 받고 시로 답례했다고 전해지며 이색(李穡·1328~1936년)은 국내에서 열린 연회에서 포도주를 마신 감상을 한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포도주(蒲萄酒) 제조법은 1540년대 김유가 작성한 경상북도 지역의 고조리서인 “수운잡방”에 처음 나온다. 하지만 이때의 제조법은 쌀을 기본으로 한 제조법에 포도를 넣은 어찌 보면 쌀과 포도가 결합된 혼합주 형태였다. 또한 이 당시의 포도는 현재 포도 품종이 아닌 머루일 확률이 높다. 포도는 한 송이에 매달린 알맹이가 한꺼번에 익어가고, 머루는 드문드문 익어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당시 포도라 지칭되는 그림들을 보면 한 개의 포도송이 안에 검붉게 익은 포도와 아직 익지 않은 포도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머루로 추측된다.

수운잡방 / 출처-안동시


  이후 인조 14년(1636년) 대일통신부사 김세렴의 『해사록(海笑錄)』에 따르면 서구식 레드와인을 대마도에서 대마도주와 대좌하면서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1653년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일본을 가는 도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난파하여 가져왔던 레드 와인을 지방관에게 상납했다고 한다. 글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1)

“그들이 제주에 상륙했을 때 조선의 지휘관은 그들에게 각각 술 한 잔씩을 주었고 약 1시간 뒤에 갑작스러운 음식으로 탈 날것을 우려하여 죽을 주었다. 저녁에는 쌀밥을 주었다. 이들은 답례로 레드와인과 은잔으로 조선 관원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은잔도 돌려주고 텐트까지 바래다주었다”

   

좀 더 자세한 포도주에 대한 기록은 없을까?  

  1712년 북경으로 향한 조선사신단 중의 한 사람인 이기지(李器之, 1690~1722)의 『일암연기(一庵燕記)』2) 에 따르면  “서양 포도주[西洋葡萄酒] 한 잔을 내왔는데, 색은 검붉었고 맛은 매우 향긋했으며 강렬하면서도 상쾌했다. 나는 본디 술을 마실 줄 몰랐는데 한 잔을 다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고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약간 취기가 오를 따름이었다.” 기록이 아마도 와인을 마시고 맛을 평가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근대에 와서는 고종 3년(1866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쇄국정책을 뚫고 레드와인을 반입하였으며 이때는 와인뿐 아니라 샴페인 및 양주도 도입했다고 한다. 그가 1880년에 쓴 『금단의 나라 조선』에는 “조선인들은 독주와 폭음을 즐기고, 샴페인과 체리브랜디를 선호하며 그 외에도 백포도주와 브랜디 여러 종류의 독주를 좋아한다. 반면 적포도주는 떫은맛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항 이후 포도주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신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01년 6월 19일 황성신문에는 재미난 신문광고가 나온다(밑에 신문 참조). 서울 종로구 광화문 남쪽에 있던 구옥상전이란 가게에서 낸 광고로, 포도, 전복, 가배당(각설탕에 든 커피), 우유, 밀감주, 목과, 맥주가 나온다. 이 광고는 황성신문에 몇 번 더 등장했고 이때부터 소비자에게 판매될 만큼 포도주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1901년 6월 19-21일 광고 황성신문 /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화면 캡쳐


廣告 

葡萄酒 全鰒 牛乳 蜜柑酒 珈琲糖 木果 麥酒 

右開한 物件이 今番 만히 드러 왓스니 僉君子 사라 오시옵 

漢城泥峴 亀屋商廛


광고 

포도주, 전복, 우유, 밀감주(오렌지주스), 가배당(커피용 각설탕), 목과, 맥주 

우개(오른쪽에 기록)한 물건이 금번 만히 드러 왓스니 첨군자(여러 점잖은 사람) 사라 오시옵 

한성니현 구옥상전  



   현재와 같은 포도주는 1908년 뚝섬 원예 모범장(국세청기술연구소 전신)에서 ‘레드 워싱톤’ 포도로 시험 양조를 하면서 가능했으며 머루, 딸기주, 사과주, 살구주, 앵두주도 시험 양조를 한 기록이 있다. 특히 1910년 4월 프랑스로부터 수입한 양조용 포도(리슬링, 모스카토, 피노누아) 1,800주를 재배한 기록이 있으며 1912-14년에는 68개 품종별 당분과, 총산 함량을 분석해서 주류제조업자들에게 통보해준 기록도 있다.

자료 출처 / 국세청기술연구소백년사 발췌




1) 음식문헌연구가 고영 강의 참고

2) 조선백성의 밥상 중 '북경에간 연행사의 음식탐방기' https://issuu.com/thetasteofkorea/docs/________________________a88c0e34688ea6


작가의 이전글 조선서 빚는 술이 얼마, 탁주 빚는 자가 삼십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