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통주 이야기 옮겨오기-142
'최초'라는 단어가 가진 단어의 상징성이나 무게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업계 최초', '세계 최초'는 선구자로서 쉽지 않은 길을 앞장섰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열광하게 한다. 마케팅에서는 이목을 끌기 좋기에 마케팅 수단이 되기도 한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 기업 간의 경쟁이 긍정적으로 발휘될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주개발 사업일 것이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의 SPUTNIK(스푸트니크) 최초의 인공인성 발사 성공 이후 미국은 1958년 NASA(나사) 설립하게 된다. 이후에도 한동안은 소련이 우주 경쟁에서 앞서 나간다.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소련의 유리 가가린을 배출한다. 그로인해 미국의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실로 1969년 7월 16일 미국의 아폴로11호를 탄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을 밟게 된다. 물론 당시 냉전 시대상황에서 우주 사업은 국가간의 자존심 이었고 군사적인 이유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최초라는 단어를 얻기 위해 경쟁으로 인해 인류는 좀 더 빠르게 우주에 다가가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나라도 최초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들이 많이 있다.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년), 국산 자동차 '시발'(1955년), 중국집 '공화춘'(1912년) 등 최초라는 단어가 주는 상징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실제 세계 최초 또는 국내 최초가 아닌데도 실수 또는 의도적으로 최초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역사에 있어 '최초'라는 단어 중 일부는 당시의 여러 상황들을 단순화 시키거나 잘못된 인용이 굳어지면서 오류가 생긴 것들도 있다.
그중 최초의 커피 시음자를 아관파천(1896년)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커피를 즐긴 고종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커피 세계사+한국 가배사"에 따르면 실제 조선 사람으로 윤종의(1805~1886)가 최초의 커피 기록을 남겼다. 1848년 썼던 서양 세력의 조선 침약을 우려해서 적었던 <벽위신편>을 4년 뒤 개정하면서 커피를 소개했다. 이어서 최한기(1803~1879)도 세계지리서인 <지구전요>(1857)에서 커피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유길준(최초 국비 유학생)의 서유견문(1895년 출간)을 살펴보면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 고 커피를 소개한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책은 퍼시벌 로웰 (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이 쓴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별장으로 다시 올라가서 당시 조선에서는 최신 문물이었던 커피를 마셨다.(1884년 1월)'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문으로는 1884년 2월17이 한성순보에서 커피를 가배(珈琲)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커피 광고가 처음으로 신문에 게재된 것은 1896년 9월 15일 자 <독립신문>이었다. 퍼시벌 로웰의 책이나 신문의 광고를 봐도 고종의 아관파천 이전부터 이미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로 술의 사용이 언급된 문헌은 무엇일까? 동명성왕(주몽)의 탄생설화를 기록하고 있는 '제왕운기'(1287년)에는 천체의 아들 해모수가 물의 신 하백의 딸을 만나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많은 자료 심지어는 정부에서 발행 한 자료에서도 '제왕운기'의 고구려 탄생 설화에 술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제왕운기에 고구려 탄생 설화의 주인공인 유화와 해모수 이름은 언급이 된다 하지만 술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를 않는다. 정확하게 술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규보의 '동명왕편(1193년)'에서 처음 언급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류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먼저 제왕운기를 살펴보면 하권의 고구려기(高句麗紀)에 "아버지는 해모수(解慕漱)이고 어머니는 유화(柳花)로 황천(皇天)의 자손 하백의 외손자이시다. 아비는 천궁으로 돌아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어머니는 우발하 맑은 물가에 살게 되었네. 부여국왕의 이름은 금와(金蛙)인데, 별관(別館)을 짓고 〈유화를〉 맞이하였도다. 다섯 되나 되는 큰 알을 왼쪽 겨드랑이로 낳으니, 흐린 날에 빛나는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네."(국사편찬위원회 제왕운기 국문 번역본)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물론 중간에 설명의 글이 있지만 여기에는 술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동명왕편은 어떨까? 동명왕편은 오언고율(五言古律, 다섯단어옛형식) 형식으로 쓴 서사시이다.
세 여자가 왕이 오는 것을 보고 / 三女見君來
물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서로 피하였다 / 入水尋相避
장차 궁전을 지어 / 擬將作宮殿
함께 와서 노는 것 엿보려 하여 / 潛候同來戲
말채찍으로 한번 땅을 그으니 / 馬撾一畫地
구리집이 홀연히 세워졌다 / 銅室欻然峙
비단 자리를 눈부시게 깔아 놓고 / 錦席鋪絢明
금술잔에 맛있는 술 차려 놓았다 / 金罇置淳旨
과연 스스로 돌아들어와서 / 蹁躚果自入
서로 마시고 이내 곧 취하였다 / 對酌還徑醉
(한국고전종합DB 동명왕편 번역문)
여기서 세 여자는 하백의 세 딸로 시의 앞쪽에 이름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서 맨 마지막에 '작(酌, 술을 마시다)'자가 보인다. 또한, 이 글들에 대한 추가 설명에도 "그 여자들이 각각 그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며 마셔 술이 크게 취하였다.(其女各坐其席。相勸飮酒大醉云云)"라고 '주(酒)'자가 보인다.
이처럼 동명왕편에는 주몽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에 있는 이 내용은 약 4000자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이다. 거기에는 어떻게 해모수가 유화를 만났으며 술을 마셨고 주몽을 나았는지가 매우 구체적으로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설명되어 있다. 반면 앞에서 살펴 본 '제왕운기'는 '동명왕편'과는 다르게 매우 요약된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등장 인물로 해모수와 유화는 등장하지만 술과 관련된 내용은 적혀있지가 않다. 여기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해모수와 유화가 등장한 동명왕편의 내용이 동일하게 제왕운기에도 나온다고 생각하고 자료를 옮기는 과정 중에 제왕운기가 술이 등장한 첫 문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아닐가 생각하게 된다.
역사에서 '최초'의 우리 술 언급 자체는 큰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큰 타이틀이 아니어도 식문화사 연구에서 잘못된 역사의 기록은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있기에 정확한 역사가 기록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술의 사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제왕운기'가 아닌 '동명왕편'이라는 것과 '제왕운기'에는 술이 언급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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