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신문 펼치기(옛 신문을 보며..)-16
부제 : 조선의 약주와 청주는 다른 형태의 술이었을까?
주세법에서 맑게 여과되어있는 술을 부르는 2가지 이름이 있다. 제조방법은 다르지만 최종 형태적(여과 여부)으로는 비슷한 형태의 술이다. 하나는 약주(藥酒)이고 하나는 청주(淸酒, 사케)이다. 주세법에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제조방법은 다음과 같다.
약주 : 녹말이 포함된 재료(발아시킨 곡류는 제외한다)와 국(麴) 및 물을 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하여 제성 한 것
청주(사케) : 곡류 중 쌀(찹쌀을 포함한다), 국(麴) 및 물을 원료로 하여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하여 제성 한 것 또는 그 발효·제성과정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재료를 첨가한 것
위에 있는 주세법 상에서는 큰 차이를 알 수 없지만 주세법 시행령을 보면 약주와 청주의 큰 차이는 ‘청주 제조에 있어서 쌀의 합계 중량을 기준으로 하여 누룩을 100분의 1 미만으로 사용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제조법이 같아도 누룩을 1% 이상 사용하면 약주이고 1% 미만을 사용하면 청주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같으면서 다른 약주와 청주에 대한 조선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약주가 52번이 청주가 108번 언급되고 있다. 처음 약주(藥酒)가 언급된 것은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1405년) 5월 24일에 일이다.
“의정부에서 예궐(詣闕)하여 약주(藥酒)를 올리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청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러서 좇았다. 처음에 임금이 가뭄이 심함을 근심하여 어선(御膳)을 줄이고 풍악을 폐하며, 혹 낮에 한끼만 들기도 하여 20여 일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가 흡족히 내렸기 때문에, 하윤(河崙)과 조영무(趙英茂) 등이 술을 올린 것이다.”
신하들이 태조의 건강을 위해 약주를 마시라고 청한 것이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약주에 대한 내용 중 임금과 관련된 내용은 건강을 위해 술을 마시기를 청하였고 이때의 기록은 대부분이 약주(藥酒)로 기록이 되어있어 있다(일부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도 약주로 기록하고 있다).
가뭄이 들었을 경우 임금은 평소에 마시는 술을 줄이게 했고 그로 인해 신하들과의 언쟁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있다. ‘조선왕들, 금주령을 내리다’라는 책에도 그러한 내용이 적여 있다.
“술은 오곡의 정기라 적당하게 마시고 그치면 참으로 좋은 약입니다. 정부 대신이 신 등으로 하여금 기필코 술을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 등의 청을 굽어 좇으십시오.” 임금이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연이 굳이 청하기를 네댓 번을 하고, 민의생은 눈물까지 흘렸으며, 승지들도 술을 권하였다. 그럼에도 임금은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마땅히 요량하여 마시겠다.” - p52(세종에 관한 실록 기사)
청주(淸酒)와 관련된 내용은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407년) 10월 19일에 처음 거론되었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이태귀(李台貴)를 보내어,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수호관(守護官) 종정무(宗貞茂)에게 조미(造米)·황두(黃豆) 각각 1백 50석, 송자(松子) 1백 근(斤), 건시(乾柿) 60속(束), 소주(燒酒) 10병(甁), 청주(淸酒) 30병(甁), 천아(天鵝) 1수(首), 은어(銀魚) 1항(缸)을 주고, 또 종정무의 어미에게 홍단자(紅段子)·초(綃) 각각 1필(匹)씩을 주었다.”
대마도의를 지키는 종정무에게 청주 30병을 하사한 기록이 있는 것이다. 이후 많은 기록에도 청주에 대한 기록은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 또는 사직관련 제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럼 이 당시 약주와 청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떠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술 자체를 하나의 약으로 생각하고 약을 임금에게 마시기를 권하였다. ‘조선왕들, 금주령을 내리다’라는 책에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시대에 술은 바로 약이요, 음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허약할 때 약으로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을 때 술을 함께 마셨다. 술은 곧 약주(藥酒)요, 음주는 복약(服藥), 즉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에 자주 쓰인 주식(酒食)이라는 말도 술이 일종의 음식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준다. 술과 약, 술과 밥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처럼 주식동원(酒食同源)이자 주약동원(酒藥同源)이었다.”
“조선인들에게 술은 몸이 좋지 않을 때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먹는 약이요, 약을 먹을 때도 반드시 같이 마셔야 하는 일종의 음식이었다. 술은 오곡의 정기가 들어 있으므로 적당하게만 마시면 참으로 좋은 약이었다. 신하들은 임금이 매일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술을 드시라고 강권하였다. (p 7)“
그렇다면 약주라는 말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약주 명칭 관련된 설은 몇 가지가 있다. 가장 많은 것이 금주령을 피하기 위해 청주를 약으로 마셨다는 이유로 이름이 약주가 되었다는 설, 선조 때 서성의 집에서 빚은 술이 유명하였고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었고, 그가 사는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좋은 청주를 약주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이 설은 개인적으로 조선왕조실록 초인 태종 때부터 약주라는 말이 쓰인걸 로 봐서 신빙성이 약한 듯하다). 이 외에 <간본규합총서>에 약주라는 주품이 나오고 약산춘과 약주를 연결하여 약산춘의 간편한 술빚기가 약주라 이야기하기도 한다.(1)
이러한 설과는 달리 우리나라 음식과 과자 중에 약(藥) 자가 붙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약과(藥果), 약식(藥食), 약포(藥脯) 등이며 이것은 의식동원 또는 약식동원의 기본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음식에 참기름이나 꿀을 넣어 몸을 약처럼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약”자가 붙은 경우처럼 약주라는 말도 몸에 좋은 술에 붙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약주 정의를 찾아보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술밑을 여과하여 만든 맑은술”로 이야기하고 약주라는 것은 약효가 있는 것이라고 인정되는 종류의 술이거나 처음부터 약재를 넣고 빚은 술을 뜻한다. 의미가 맑은 술을 뜻하는 것으로 변천되고 술의 높임말로 쓰이게 되었다.
고식문헌에 청주에 대한 검토 자료를 보면 청주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구체적 제법이 없어 정확히 어떤 술을 지칭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빚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주방문에도 “청주”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술은 많지만 일반적으로 ‘맑다’, ‘시원하다’라는 것을 강조하여 이름 붙여진 술들이다. 즉, 대다수의 “청주”는 주품으로서 고유명사가 아니고 일반 명사인 셈이다.(이상훈 선생님 글 참조)
‘청주’라는 단어는 한자어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맑은 술’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에도 맑은 술을 청주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일본 역시 맑은 술에 있어 청주(사케)라 부르고 있다. 우리도 과거에 맑은 술은 청주라 불렀다. 그러기에 청주는 동아시아에서 맑은 술을 가리키는 단어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약주’라는 단어를 약재가 들어간 술 또는 웃어른들에게 올리는 술로 인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앞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조선에는 임금이 마시는 약이 되는 술을 ‘약주’라 부르거나 ‘청주’를 높여 부르거나 말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완벽한 것이 아닌 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추측일 수 있다. 아직 완전한 번역이 안 된 승정원일기에서는 청주 86회, 약주 59회가 언급되어 있으면 그 내용은 아직 국역되어 있지 않은 게 많다. 한국 고전 종합 DB(http://db.itkc.or.kr/)의 많은 자료들를 통해 우리술들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술들도 주세법에서 상의 ‘약주’, ‘청주’라는 개념을 넘어 문화적인 면과 역사적인 고증 연구를 통해 우리술들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워 가야 할 것이다.
다음 글은 현재의 약주와 청주 모습과 발전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