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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여덟번째

백제의 부흥기, 왕릉에 올라서다 - 2

 지난 글에서 한강길 4번째 코스 중 잠실나루역에서 시작하여 몽촌토성까지 돌아봤습니다. 이번에는 몽촌토성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을 시작하여 방이동에 고이 숨겨져 있는 왕릉을 찿아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석촌호수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얘기하며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상상속 한성백제를 만나는 곳 


 몽촌토성을 거닐다 보면 옛 목책을 복원하여 설치한 곳과 해자가 있었던 곳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모두 잔디밭으로 변하여 구분할 수 없지만 복원된 목책이 있는곳에 성내천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토성 중간에는 백제집자리 전시관을 만나는데 토성내 집터를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한 것으로 백제 초기 백성들이 살았던 집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전시관을 지나 왼쪽을 내려다 보면 올림픽경기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경기장앞 너른 공터에는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기 때문에 항상 분주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좀더 여유롭게 인적이 드문곳으로 가려면 토성위로 걸어가야 합니다. 토성따라 걷다가 운이 좋으면 토끼 무리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토성에서 내려와 올림픽공원내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곳은 늦은 저녁까지 개방하는 곳으로 2,000여년 간 수도의 역할을 한 한성, 서울을 옛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고대사 및 고고학 전문 박물관입니다. 앞서 설명했던 공사기법이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모습 등을 보실 수 있는 장소입니다. 

 지금까지 귀로 들으면서 몽촌토성의 겉 부분을 보았다면 한성박물관에서는 눈으로 토성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토목공사를 했을지도 마음껏 상상하며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정도의 토목공사를 하려면 약 년간 100만명 이상의 인원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쌓는것이 아니라 다지고 또 다지면서 쌓아올려야하는 공법입니다. 


 박물관을 가기위해 너른 광장을 지나가다 보면 다양한 조형물을 만나게 됩니다. 서울 올림픽 개최할 때 문화축제의 하나로 32개국 36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야외조각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조성된 곳입니다. 올림픽공원 4개의 권역에 약 200여 점 작품이 들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곳은 레드존으로 소마미술관과 연계하여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올림픽공원은 한강길 코스가 아닌 자체 토성을 한 바퀴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있는 곳입니다. 공원과 쉼터, 자연과 문화시설이 공존하는 서울에서 2번째로 큰 공원이기도 합니다. 



방이동 백제고분군 (서울방이동 고분군)


 한성백제박물관을 뒤로하고 방이동 방향으로 걸어가면 고분군이 놓여있는 동네를 만납니다.  이곳 방이동과 석촌동에는 찾기 어려운 곳에 고분군이 흩어져 있습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고분군이 있는데 전에는 백제고분군이라고 불리웠으나 정식 명칭이 2011년에 변경되어 '방이동고분군'이라고 불리웁니다.  이곳은 백제 초기의 무덤군이 8 기 정도 있는 곳입니다. 앞에 1호부터 3호까지는 여러분 보시는 왼쪽 위쪽에 있는데 굴식돌방무덤입니다. 관이 있는 전실까지 통로를 따라가는 구조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4,5,6기 고분군은 형태가 다른데 여기서 출토된 유약이 입힌 접시 자기가 전형적인 신라시대 토기로 추측하고 있어서 신라인이 백제로와서 만들었던지, 아니면 한강유역을 신라가 점하고 있었을 때 만들었던 무덤군인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 고분군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의 장소는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를 통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 고분군 또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백제 전체의 무덤에서 남방식 신라와 백제의 무덤이 혼재된 곳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피어 '방잇골'로 불리다가 한자음으로 '방이동'이 되었다 방이(芳荑)라는 의미 자체가 개나리 또는 비름 또는 볏과의 띠 식물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꽃이 많아 향기가 퍼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전에 1코스 청계천 지날 때 방산시장 유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는 방산시장의 ‘방‘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곳 고분군은 저한테는 추억이 있는 장소입니다. 바로 고분군 정문 왼쪽 건물에서 회사를 다녔었는데 점심시간때 산책을 나오기도 했었던 장소이자, 깊은 고민을 풀기위해 생각하거나 대화하기 위해 찾아오던 곳이였습니다. 그당시에는 백제군 묘역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고, 그저 서울 외곽에 이러한 무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이던 때였습니다. 방이동 고분군사거리에서 석촌역 방향으로 걸어가면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아파트와 작은 주택단지가 인접해 있는 석촌동을 지나갑니다. 백제의 도성이였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왼쪽으로 고위층의 무덤이 즐비하게 놓였었다고 합니다. 무덤은 돌을 쌓아놓은 형식이였기에 돌이 많았던 동네라서 ‘돌마리’라고 불이우다가 한자음으로 ‘석촌동(石村洞)’ 이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기상을 보여준 석촌동 고분군


 석촌동 동네를 거쳐 다다른 곳은 석촌고분군이 있는 근린공원입니다. 백제초기의 적석총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장소입니다. 예전 유흥준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도 소개되었던 곳으로 양모양 석상 아랫부분 쌍방울(?) 에피소드가 있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여기는 석촌동 고분군입니다. 주변에 보면 8개 정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이 펼쳐져 있습니다. 앞서 방이동고분군에서 보아왔던 무덤을 보면 봉분만 있는 형태지만 이곳은 좀 달리 보입니다. 백제 초창기시대의 무덤군인데 고구려의 양식을 받아들인 형태입니다. 1911년 9월 18일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백제시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고 보존 순위 두번째인 ‘을(乙)’ 등급이 부여되었다고 합니다. 1916년 가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돌무지무덤’과 ‘토총’으로 구분되었으며, 같은 해에 간행된『조선고적도보』 제3권의 ‘석촌부근백제고분군분포도’를 보면 ‘갑총’(흙무덤) 23기와 ‘을총’(돌무지무덤) 66기가 수록되어 있어서 석촌동 일대에는 1916년 이전까지 최소 89기의 고분들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그 많은 무덤이 어디로 갔을까요? 세월이 흘러 이곳에 집이 들어서고 개발하게 되면서 주변에 돌을 사용하여 담을 만들거나 다른 용도를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1970년대 초부터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현재 4,5기 정도의 적석총이 남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돌무지 무덤은 북방계 민족이 사용하던 방식인데 돌을 쌓은 이유는 야생동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위해서입니다. 이외에도 무덤의 존속을 위해서도 이형태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계는 야생동물이 별로 없다보니 봉분만 쌓아서 무덤을 유지하는 구조를 채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북방계 형태를 띄우는것으로봐서 백제 초기 건국을 이끈 사람들이 고구려계의 온조를 비롯한 이주민들이 주력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백제건국 설화를 보면 온조가 주를 이뤘다는 얘기와 비류가 우선이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는 듯 합니다. 이곳에서 가장 큰 돌무지 무덤은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주요 출토물이 4세기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지만,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애매합니다. 시기상으로 맞다고 볼 수 있으나 확정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것입니다. 고대 유적에 대한 기록과 고고학적 연구가 더 있어야 알려질 것이라 봅니다.


  한강유역에 도성으로 정한 이유는 물류운행의 최적의 장소이자, 북쪽으로 부터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 이기도 합니다. 한강 상류 유역에는 철광석을 캐내어 제련하고 운송하기위한 마을이 포진해 있는데 이또한 한강을 점유하기위해 삼국이 쟁탈전을 벌였던 이유 중에 하나였을 것이며 한강유역을 점유한 국가가 번성하였다는 것은 삼국시대 역사에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이처럼 한강은 예로부터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강이였습니다.



잠실섬의 중심나루였던 송파나루와 석촌호수(송파나루비 앞)


  석촌동 고분군을 가로질러 근초고왕 무덤을 뒤로하여 빠져나가면 요란한 조명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섞여 들리기 시작합니다. 석촌호수에 있는 롯데월드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기도 합니다. 석촌호수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잠실동 일대가 예전에는 섬이였다는 것을 아시나요? 현재 잠실의 값어치는 엄청날겁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한강에 펼쳐진 모래가득한 섬이였던 잠실섬(옛 지명은 부리도였다.)을 얘기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잠실 일대는 과거에 잠실 쪽 한강에는 토사가 쌓여 형성된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부리도를 중심으로 남쪽 물길인 송파강과 북쪽 물길인 신천강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그중에 송파강을 탄천을 만나고 경기도 광주일대 및 영월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포구가 삼전도와 송파나루 였습니다. 송파나루 또는 송파진은 광나루와 더불어 한강 상류에서 들어오는 배들이 처음 만나는 포구이자 나루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송파나루 또한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나루로 발전했습니다. 송파나루 이전에 삼전도나루가 먼서 운영이 되었었는데 병자호란이후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우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건넜던 강이 있는 곳이자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던 장소가 삼전도였는데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삼전도 부근에 항복을 의미하고 제후국으로 충성한다는 의미로 비석을 세우게 합니다. 이또한 규모가 작다고 하여 다시 제작하여 비석을 세웁니다. 지금도 석촌호수에는 삼전도 비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이후로 삼전도나루는 사용하지 않는 나루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대신 눈에 뜨인 나루가 송파나루였고 조선 후기에는 송파나루가 중심 나루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과 물류의 유통이 확장되면서 송파나루에는 송파장이라는 장날이 들어섰으며 이를 근거지로 하여 한양의 시전상인들을 위협할 만큼 유통규모가 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금난전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경쟁상태의 상업이 활발해 지다보니 더욱 발전하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초반 잠실일대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함으로써 섬을 육지화하는 대공사를 합니다.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이 바로 현재의 석촌호수로 남게 된 것이고, 당시 매립공사로 생겨난 땅이 현재의 잠실동과 신천동이라는 지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롯데월드가 있는 쪽이 동호이고 반대편이 서호입니다. 호수의 폭을 보면 남쪽강이였던 송파강의 규모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서호방향으로 100여 미터 걸어가면 송파나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석촌호수를 중심으로 주변의 동네 이름이 신천동과 삼전동입니다. 모두 한강의 옛이름과 삼전도(삼밭나루)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을 아실 겁니다.


한강여행 4번째는 여기까지입니다.


 (1960년대 잠실 일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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