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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아홉번째

5코스 강남의 발전, 영동대교 건설_1

여행코스 : 잠실역 - 석촌호수 - 신천역(잠실새내역) - 탄천 - 성수대교 - 서울숲역 : 9.4km    

               

  한강을 걷다보면 어느쪽 동네가 많이 바뀌었을까 궁금해 했었습니다. 한강 주변에 옛지도를 찾아 보기도 하고 웹사이트 검색을 해보면 상전벽해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2군데 정도 발견할 수 있는데 공통점은 모두가 한강에 위치한 과거에 섬이 였던곳 입니다. 첫 번째는 잠실섬(부리도)이였고, 두 번째는 난지도(또는 중초도)입니다. 이외에는 한강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포구 또는 갈림길이 있는 길목을 중심으로 규모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지형적으로 변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한강 주변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 한강 개발을 시작하면서 제방을 쌓고 물길을 조정하고 수중보를 세우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했습니다. 그전까지 한강에는 여러 섬들이 펼쳐져 있고 하얀 모래 가득했던 아름답고 평평한 강이였습니다.      

  큰 변혁이 있었던 섬 중에 첫 번째인 잠실섬이였던 곳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석촌호수에서 시작하는 5코스는 잠실주변을 거쳐 성수대교를 건너가는 코스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숲으로 이어갑니다.          

 


신천강 흐르던 잠실섬을 아시나요     


 잠실역이 있는 곳은 석촌호수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40여 년전에는 섬이였던 곳입니다. 1960년대 서울의 지도를 보더라도 현재의 한강본류보다 잠실섬아래 강이 보다 넓고 본류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섬에는 도로가 있어 한강을 건너 용인, 광주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한강의 남쪽강은 송파강이라 불리웠고, 현재는 석촌호수로 남아있는 강이며, 잠실섬 북쪽의 강은 신천강으로 불리웠고 잠실섬 끝자락인 지금에 탄천변 부근에서 송파강과 신천강이 만나 다시 한강본류로 흘러갑니다. 1970년대 한강을 개발하기위해 가장 큰 섬이였던 잠실도와 왼쪽편에 있었던 부리도, 그리고 그옆 작은 섬인 무동도 3개 섬을 연결하고 송파강이 흘렀던 남쪽 물길을 막고 북쪽물길을 넓혀 잠실지구라는 육지화된 넓은 땅이 생겼습니다. 매립에 필요한 토사는 처음에는 잠실섬의 신천강 일대의 모래와 자갈을 채취하여 사용하다가 자재가 부족해지면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허물어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마침 서울 도심이 확대되면서 발생한 연탄재 쓰레기를 매립해야 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잠실섬 일대를 매립 진행하였습니다.      

 잠실섬은 조선 초기에 거의 강 북쪽 육지에 붙어있는 섬 이였습니다. 장마가 지면 섬이요, 아니면 육지인 곳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넓은 강변에 뽕나무를 심어 양잠사업을 국가차원에서 진행하고 장려하기위해 ‘잠실도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습니다. 이때 나온 말인 ’잠실’이 지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누에를 치는 장소인 ‘잠실’이 송파구 잠실동과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에 있었는데 전자는 ‘동잠실‘이라 칭하고, 후자는 ’서잠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강 남쪽의 잠실은 한남대교 아래 현재 잠원동이라 불리우는 곳까지 잠실이 존재했는데, 성종때 이곳에 만들어진 잠실단지를 ’신잠실‘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잠원동의 옛 지명을 알아보면 잠실리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1960년대 잠실리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송파구 잠실동과 겹치지 않게하기 위해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잠원동으로 양잠단지가 확대된 이유는 조선후기에 거듭되는 홍수로 신천강이 넓어지면서 일부 잠실단지가 침수가 일어나기 때문에 강변을 따라 지금에 잠원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이후 잠실섬은 일제 강점기에는 밀과 메밀을 경작하였고, 이후에는 서울사람들의 채소공급처로 무, 배추, 땅콩, 수박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잠실섬옆에 송파강과 탄천이 만나는 면에 접해있는 섬이 부리도였는데 장마가 지면 홀로 떠있어 “물에 떠내려온 섬”이리고 하여 부리도라고 불리웠습니다. 또 하나의 작은섬인 무동도는 섬 남쪽에 ‘춤추는 아이와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입니다. 이렇게 잠실지구를 이루었던 3개의 섬은 통합되고 내륙화 되면서 1971년 정부는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기존 잠실섬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에게는 등기된 땅의 40%를 대체토지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등기가 없는 사람은 약간의 이주비를 지급함으로써 정든 고향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곳의 개발이익은 공사에 참여한 대기업과 허가를 내준 권력자의 차지가 됩니다. 일설에는 현대건설이 강남을 개발할 때 단 돈 100원에 낙찰을 받아서 개발했다는 후문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강남권과 잠실일대는 개발이 시작되었고, 송파강의 물줄기와 탄천의 물줄기도 변화하여 지금에 직선으로 흐르는 탄천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잠실역에서 롯데월드를 따라 돌아서 걸어가면 동호와 서호 사이에 있는 도로변 옆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 유리벽을 만나게 됩니다. 유리벽안에는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삼전도비라고 하며 삼전도나루에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삼전도나루는 세종 때에 만들어진 나루로 한강나루(한강진), 노들나루(노량진)와 함께 경강삼진으로 이 일 때에 대마(삼)를 심은 밭이 많아 삼전도 또는 삼개나루로 불리웠고, 나라에서 관리하는 나루였습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 태종의 명으로 경기도 광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을 때 태종의 부름을 받으면 이곳 나루를 이용해 태종이 머물렀던 지금의 자양동에 있는 ‘낙천정‘이라는 별장으로 문안인사를 하러 오갔다고 합니다. 이후 삼개나루는 여주 세종릉과 한양의 이성역할을 했던 남산산성를 가기위해 필요한 나루터였으며, 우리가 역사에서 기억하는 것은 ’삼전도의굴욕’이라는 사건을 통해 삼전도라는 지명이 익숙합니다. 


  인조가 병자호란이 끝나고 이곳 삼전도(삼개)나루에서 제단을 설치한 청 태종(숭덕제)에게 세 번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또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여기서 행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후 승리한 청황제에게 제후국으로써 인사하는 자리가 된 셈입니다. 이후 청나라는 승리를 자축하고 기념하기위해 인조가 무릎꿇고 항복했던 삼전도나루에 비석을 세웁니다. 이를 삼전도비 또는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합니다. 비문에는 몽골, 만주, 한자로 병자호란의 상황과 청나라에 항복하게된 경위 등이 쓰여져 있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항복의 장소에 제단을 쌓았던 자리에 비석을 세우면서 청나라의 요구로 보다 더 크게 비석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위에 비각을 세우는 작업까지 더하여 1640년 4월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글씨가 마음에 안들어 다시 쓰게하고 글자에 채색을 하는 등 많은 요구사항을 맞춰주려 하다보니 공사기간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이후 청나라 사신들은 삼전도비가 있는 곳을 방문하는 것이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관리가 부실하다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위해 영조까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영조는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에 방문함으로써 백성들이 불편하고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삼전도까지 방문하지 않고 탁본을 떠서 청나라 사신한테 제공하는 것으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경교명승첩에 그려진 송파진- 오른쪽 작은 건물이 삼전도비각이다.


  이후 삼전도나루는 방문하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나루가 되었고 그 옆에 있던 송파나루가 번성하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전도비는 조선 말 고종때 되어서 상황이 변합니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나라와의 관계를 청산하면서 영은문과 함께 삼전도비를 무너뜨려 엎어버립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면서 조선총독부에서 고적 및 유물 보존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각지역에 있는 유적을 조사하는데 이때 삼전도비도 보존대상으로 올라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라는 명칭으로 보존되게 됩니다.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비석의 운명도 다시 변합니다. 일제시대에 보물로 지정되었던 공덕비는 대한민국정부 들어서며 국보 164호로 지정되었다가 당시 김장흥 치안국장의 건의로 국보지정이 해제되었고 비석을 뽑아 땅에 묻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석이 있었다는 표시석을 세웁니다. 이후 한강의 수해로 인해 비석 모습이 들어나고 침식이 일어나면서 이를 건저 제자리에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합니다. 이후 사적으로 관리를 받으며 현재 위치에 세워져 보관되어 있습니다. 삼전도비는 몽골어와 만주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언어학적으로 연구의 대상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삼전도비가 있는 곳에서 뒤편을 보면 현재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롯데타워가 보입니다. 말도 많았던 롯데타워가 처음 계획된 것은 김영삼 정부시절입니다. 애초에 건설허가가 승인될 때 40층으로 시작했지만 이명박 정부시절에 서울공항의 활주로를 3도 조정하고 공사비를 지원하고 지하에 환승센터 등을 설치하는 등 교통 정책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추가승인이 됩니다. 2010년 착공을 시작해서 2017년 4월3일 개장하였고 지상123층, 높이555m 세계에서 6번째, 아시아에서 3번째 높은 빌딩이 되었습니다. 76층에서 101층까지는 시그니얼 서울 호텔, 42에서 71층은 223세대가 거주하는 시그니엘 레지던스 오피스텔이 들어서있고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중 하나입니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뽕나무밭에서 빌딩숲으로 변하여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제때 복원한 삼전도비
고종때 쓰러뜨린 삼전도비

          

 운명이 바뀐 삼전도나루와 송파나루


  석촌호수를 따라 반대편을 돌아가면 송파나루터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석촌호수는 앞서 얘기했듯이 송파강이 흐르던 것이였고 이곳에 송파나루와 삼전나루가 있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송파나루는 치옥의 현장인 삼전도나루를 대신해 새로 설치된 나루입니다. 숙종 때부터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고, 정조 때 신해통공이 발표되면서 유통량이 증가하게되고 주로 서울에 땔감과 담배 등을 서울에 공급하는 시장으로 기능이 커지게 된 곳이 송파나루 입니다. 서울 육의전과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피해 강원도와 삼남지방의 물품을 이곳에서 미리 사들여 도가상업(都家商業)의 근거지를 만들었습니다. 장사꾼을 유치하기 위한 이벤트인 송파별산대 놀이는 한양에서 재인을 초빙하여 새로이 산대 놀이패를 만들어 공연한것이며, 현재에는 송파산대놀이가 무형문화재 49호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송파나루의 시장규모는 매우 컸고 한양도성의 시전상인들이 경계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전상인은 각 품목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며 이득을 취했지만, 송파의 시장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받아들여 운영하였으며 거리도 멀기도 했기 때문에 쉽사리 도성안 상인들이 간섭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송파나루는 1960년대까지 이어오다가 잠실지구 내륙화 사업이 벌어지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송파라는 명칭은 소나무언덕이 있었기에 붙여졌다는 설과 나루터 이름인 연파곤(淵波昆)이 변음되어 ‘소파곤‘이 되고 또 변하여 송파라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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