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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열세번째

삼남대로의 시작, 동작진과 노량진_1

  어느새 한강을 이어서 걸은지 계획한 코스에 절반을 걸었습니다. 한강길 코스를 기획할 당시 총 12개 코스, 108km로 구성하였고, “아리수, 열수, 경강 그리고 한강”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코스가 끝나고 7코스가 시작되는 한남역과 한남대교일대는 한강하구에서 올라오는 수하지역의 배와 한강상류에서 내려오는 수상지역의 배들이 만나는 곳이였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지나쳤던 두모포구가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또다른 이유가 더 있는데 조선시대 초기만해도 서해안의 바닷물이 밀물때가 되면 한강을 타고 두모포가 있었던 곳, 즉 중랑천합수부 일대까지 바닷물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한강하구에서 올라오는 배가 노를 젓지 않아도 밀물로 인해 두모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옛 일본의 통신사 또는 사신들이 두모포에 내려 광희문을 거쳐 태평관에 도착하여 여정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지금껏 한강상류지역을 둘러보며 걸어 내려왔다면 7코스 부터는 한강하류 지역을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한강만 따라서 걷다보면 지루하거나 심심할 수 있어 주변에 숲길과 한강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들을 포함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7코스는 한남역을 출발하여 잠수교를 건너 동작대교와 현충원을 거쳐가는 코스입니다.



고속도를타고 씽씽 달리는 한남대교


한남역은 출구가 1개 뿐입니다. 그래서 1번 출구만 있고 더는 없습니다.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역사이며 전철이 수시로 다니지 않아 잘 모르는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남동 일대는 나름에 역사를 담고 있는 자리입니다. 1번 출구로 나와 한남역삼거리에 가운데에 한강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 이를 따라 내려가면 다시 한강변에 이릅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잠수교가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이번 일정에 시작입니다. 푸른물이 넘실대는 한강을 바라보다 왼편에 수많은 차량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다리가 한남대교입니다.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로 가기위한 고속도로의 시작구간이자 1번 경부고속도로의 출발점입니다. 1970년대 고속도로 무용론이 나올 정도로 무모한 계획이라고 했지만 만약, 경부고속도로가 없었다면 정말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남대교는 1969년에 완공되었는데 강남개발을 위해 놓인 다리이기 보다는 지방으로 원활하게 이동하기위한 도로와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리라고 볼 수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나지 않은 의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유사시 서울시민들이 한강을 건너기위한 다리였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현재의 한강대교)만으로 서울 북쪽의 인구를 모두 내려 보낼 수 없었음을 경험하였기에 이러한 목적을 두고 1960년대까지 3개의 다리가 건설되었고 4번째 다리가 제3한강교였습니다. 지금은 한남대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지금 바라보고 있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한남대교 북단은 예전에 한강진이 있었고 이곳을 통해 용인과 영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영남대로의 길목이였었습니다. 지금은 전국으로 내려가야 하는 고속도로의 길목이 되었습니다. 마을모습은 바뀌어도 길은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길은 그대로 흔적을 가지고 넓게 변모했습니다.


  잠수교를 따라가는 길에 오른편에 위치한 동네가 한남동, 서빙고동과 동빙고동, 보광동 등이 있다. 익숙한 동네 지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동네도 있습니다. 동네 이름마다 유래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곳은 여기뿐일 겁니다. 단순히 마을의 형세가 아닌 제사를 지내던 곳, 국가에서 필요한 관청이나 건물이 있었던 곳, 또는 큰 사찰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입니다. 보광동의 경우, 신라시대 때 보광국사가 세운 사찰이 이곳에 있었으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존재했던 사찰이자 국가의 기우제를 지낼 때 활용했던 곳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광동에는 윗말과 아랫말에 각각 부군당 또는 사당이 남아 있는데 오신중학교 옆에는 김유신장군을 신격화하여 모신 흥무대왕김유신사당이 있고, 윗말이라 불리웠던 이태원역 근처에는 부군당공원이 있는데 이곳은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이 있으며 지금까지 매년 2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냅니다. 한강주변에 부군당 또는 사당이 많은 이유는 뱃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것도 있지만 외지 상인들이 자주 오가는 만큼 무사기원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태원지역은 다양한 나라의 식문화가 결집된 상권이 발달해 있는데 이또한 예전 포구이자 상인들이 다녔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강진이 있었던 한남동일대에서는 국가에서 운영 및 관리하던 제천정이 존재하였었는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이자,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였습니다. 게다가 관리들 중에 지방으로 내려가는 동료를 위해 전별연을 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현보가 영천군수로 떠날때의 모습을 담은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이라는 그림을 통해 당시 제천정과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국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되는데 한강주변에서도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특히 한강진, 용산, 저자도, 광진 등에서 행하여 졌고 비가 올때까지 12회차에 걸쳐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처음 1회부터 5회차까지가 한 주기로 보고 제사를 지냈으며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기우제를 지내고 6차부터 11회차 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마저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마지막 12회차에 다섯방위에서 흙을 구하여 용의 모습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오방토룡제를 지냈습니다. 한강의 제단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고 한강진과 광진에서는 호랑이머리를 강물에 던지는 침호두(沈虎頭)를 거행했습니다. 한강에 살고있는 용을 자극하기위해 호랑이 머리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용이 흥분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는 의미로 거행하였습니다. 용이 움직이면 구름이 일고 비가내린다는 속설을 믿었는데 용을 깨우려면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동물을 보내 자극해야 했는데 그 동물이 호랑이 였던 것입니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침호두라는 기우제의식은 조선초기부터 조선말기 까지 국가에서 직접운영하는 기우제 방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태원동에 가면 우사단길이 있는데, 우사단(雩祀壇)은 한강진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었으면 현재는 위치는 알 수 없고 지명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기우제를 지냈던 장소를 보면, 1차는 삼각산과 목멱산, 한강에서 제를 지냈고, 2차는 용산강과 저자도, 3차는 산천단과 우사단, 4차는 북교와 사직, 5차는 종묘, 6차부터 9차까지는 앞의 순서와 동일하게 진행하였고, 6차 한강에서의 기우제에서 침호두를 거행했습니다. 10차는 사직단과 경회루 못가에서, 12차는 종묘, 춘당대 못가에서, 마지막 12차는 오방토룡제로 한강주변에서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서로 비가올때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 노력이 정말 가상하여 하늘에서 비를 내렸을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강변을 따라 잠수교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을 보면 둔치산이 있고 그 아랫자리가 보광동 옆 서빙고동과 동빙고동이며, 국가에서 보관하던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빙고는 한강이 범람하더라도 침수되면 안되기 때문에 한강에서 조금 떨어진 둔치산 주변에 빙고를 설치하였습니다. 빙고는 조선시대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에서 존재했습니다. 경주시내 월대(예전 안압지)옆에 가면 월성터가 있는데 그곳에도 빙고가 존재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경주 월성의 석빙고 모습)  



한강의 수위를 알려주는 기준 잠수교


한강을 따라 수면에 바짝 붙어 있는 다리가 보입니다. 다리 중간에는 아치가 만들어졌고 그 위에 대교가 하나더 있는 2층 다리가 보이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잠수교입니다. 왜 잠수교라는 이름이 생겼을까요? 말 그대로 물에 잠기게 만들었기 때문에 잠수교입니다. 그렇다면 한강의 다른 대교처럼 교각을 높이세워 건설하지 않고 이렇게 수면에 바짝 붙어 있게끔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장마 또는 밀물때에 급격히 한강주변에 물이 불어나면 어느 정도 불어나는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강에 일정 수위 이상이 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릴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잠수교처럼 수면위에 바로 다리를 건설하여 한강수위를 측정해보는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잠수교는 1976년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사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였습니다. 이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숨어 있었는데 197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다리는 유사시 강북의 주민을 빨리 대피시키기 위한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잠수교 또한 비슷한 용도로 활용하기위해 만든 다리입니다. 유사시 가장 빨리 복구를 하여 통행할 수 있도록 한강변 둔치와 같은 높이로 교량을 건설하였으며 교각간 거리도 촘촘하다 싶을 만큼 15m 간격을 두었습니다.


 잠수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모습으로 변모했습니다. 건설당시 잠수교는 한강에 바지선 등이 다닐 수있도록 도개식으로 교각위로 상판이 열리고 닫히는 방식이었으나 1986년에 교각의 일부를 아치형태로 올려 개조하여 한강에 작은 요트나 유람선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강남개발이 가속화되고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차량이 많아지면서 한남대교만으로는 교통량을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추가로 다리를 건설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잠수교위에 2층으로 다리를 만드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1982년에 반포대교가 생겨납니다. 이로써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의 교통량을 분산시켜 줌으로써 수도권의 교통효율성을 높이게 됩니다. 지금은 한강 다리중 가장 복잡하고 차량통행이 많은 다리 중 하나입니다. 잠수교는 여타의 다리에 비교하여 난간시설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였습니다. 강물에서 떠내려오는 부유물이 난간에 걸치게 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다리에 난간이 없애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지금이야 한강변 옆에 제방이 있어서 물이 도심으로 역류하지 못하고 제방 때문에 한강주변이 높아져 다리를 아래쪽으로 건설하면 불편하기 때문에 잠수교와 비슷한 다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수교는 2000년대 들어오면서 용도가 변하게 됩니다. 차량만 운행하던 다리가 한강 르네상스사업의 일환으로 사람만 다닐 수 있는 다리로 변모하게되어 2008년에 차도를 왕복 2차선으로 줄이고 보행이 가능한 인도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잠수교 주변 동네로부터 한강으로 진입이 훨씬 수월해져 강남과 강북을 안전하게 거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잠수교는 통행 제한이 되어 다닐 수 없으며 지금도 뉴스를 통해 한강 수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 역할로 보도되기도 합니다. 


 잠수교 뒤편은 서빙고동으로 얼음을 채취하고 보관하던 빙고가 있던 자리였습니다. 겨울에 채취하여 보관한 얼음은 이듬해 6월부터 9월까지 정2품 이상 관료들에게 이틀에 한 번 꼴로 배분하였고, 활인서의 병자와 의금부에 갖힌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나누어주었습니다. 8월 부터는 다시 장빙을 준비하기위해 빙고를 수리하고 교체하는 작업을 하여 다시 얼음을 보관할 준비를 합니다. 서빙고와 동빙고에 보관하는 얼음은 대체로 두모포와 저자도 사이 한강에서 채취하였는데 11월 초에 예조에서 장빙사목을 반포하고 12월 초에 장빙군마련사목을 반포함으로써 장빙을 시작합니다. 12월에 한강의 수신(水神)인 현명에게 제를 지내고 난후에 얼음을 채취합니다. 12월 또는 1월 중 오전 2시경에서 해뜨기 전까지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고 서빙고와 동빙고에 보관하게됩니다. 보통 보관하던 얼음의 양은 약 20만 정으로 얼음 1정의 무게가 약 18.7kg이니 약 3,740톤 가량 됩니다. 엉청난 양을 보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빙고동을 뒤로하고 잠수교를 건너면 서초구 반포동에 다다릅니다. 잠수교를 건너다보면 한강 수면이 손에 잡힐 듯이 매우 가깝게 있습니다. 탁한 물색을 하고 있지만 천둥오리와 가마우지떼가 제법 많이 보입니다. 이제는 잠수교를 건널 차례 입니다. 차량이 적어 걷기 좋은 잠수교따라 한강길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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