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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열두번째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_2

   응봉공원에 다다르는 방법은 2가지가 있습니다. 주택가 옆 시멘트길을 따라 경사진 길을 따라가는 방법과 주택가를 지나다 왼쪽 계단을 타고 올라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데크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자의 방법이 조금 편하고쉽지만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을 택하면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힘들 수 있지만 탁트인 한강과 중랑천의 합수부 풍경을 내려다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쉬엄쉬엄 걸어서 한강이 보이는 곳으로 보통 사람들을 이끌고 갑니다. 응봉산 꼭대기에 다다르면 가운데 팔각정이 있어 휴식과 함께 한강의 풍경을 조망하기 적당한 장소입니다. 한강의 상류와 하류쪽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파노라마보다 넓은 아이맥스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다보니 한강의 야경과 풍경을 촬영하기 적합한 출사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면 지금은 사진으로 응봉의 풍경을 담아 갑니다. 



입석포 봄 풍경이 이러했을까


  응봉공원 주변이 가장 아름다울때는 3월 중 개나리가 활짝피어날 때입니다. 응봉공원 아래 절벽이 노랗게 채색된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4월 초가 되면 벚꽃이 피면서 공원 정상이 하얗게 눈내린 듯 보입니다. 이쁘지 않은 계절이 없겠지만 유난히 3,4월이 가장 이쁘기 때문에 응봉공원의 순은 이때입니다. 특히 강변북로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더 좋지만 시야가 가리는게 많아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멋진 풍경을 가지고 있는데 보다 순수했을 예전에는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응봉 꼭대기에서 내려가는 길은 2군데가 있습니다. 올라왔던 길에서 반대편 방향으로 한강을 따라 내려가면 금호동을 거쳐 다시 한강으로 이어지고, 오른쪽 너른 길따라 내려가면 응봉동이나 독서당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옵니다. 독서당은 조선 전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젊고 유능한 관리들을 위해 수양 ·연구를 전념토록 하기위한 제도로써 세종 때에 집현전 학자중에서 일부를 선정하여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장의사(세검정에 위치해 있었던 사찰) 등 산사를 활용하였는데, 학식이 뛰어난 선비를 발굴하여 연구와 독서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관리의 능력을 키우기위한 조치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교수나 선생들이 활용하는 휴식년제와 같은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독서당에 들어가 공부하는 동안 그 비용은 국가에서 지원하며 별도로 녹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학업의 효율을 위해 산사 또는 도심의 비어있는 사찰을 이용하였고, 세조 때 사육신사건으로 폐지되었다가 성종 때에 용산에 비어있는 사찰을 활용하여 독서당을 운영하였습니다. 중종 때에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 응봉아래 자락에 독서당을 신축하고 ‘동호독서당’이라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실될 때까지 학문연구와 도서관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됨에 따라 완전히 독서당 제도가 폐지됩니다. 독서당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1개월에서 3개월 정도이며 최대 6명까지 선발하였으며, 영조때에는 수시로 선발하여 약 320명 가량이 독서당에 상시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봉아래 맞은편에 있는 공원이름이 독서당공원이 되었습니다.  응봉에서 한강을 내려다 보면, 정면에 압구정동이 위치하며, 왼쪽으로 보이는 붉은색 다리가 성수대교입니다. 오른편에 보이는 주황색 다리는 동호대교이며 그 다음에 보이는 다리가 한남대교입니다. 한강길 6번째 코스는 저 멀리 보이는 한남대교까지 걸어 갑니다.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72동 근처에 가면 압구정터 표시석이 설치되어 있어 찾아볼만 합니다.



한강의 이름은 동호한강경강?


  응봉산공원을 내려와 금호동에 이르면 대장간터 표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의 옛이름은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 불리웠는데 이를 한문으로 옮기면 수철리(水鐵里)가 됩니다. 이곳은 두모포옆으로 농기구 및 무쇠솥, 수리용 기구를 제작하고 만들어 판매하던 대장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수철리‘라는 지명이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어졌고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지명을 정리하면서 금호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금호동의 ‘금(金)’은 수철리의 철(鐵)에서 나오고, ‘호(湖)’는 수(水)에서 인용하여 만들어진 동네입니다. 서울에는 수철리 또는 무쇠막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더 있습니다. 서강대교 북단은 신수동으로 옛 이름이 수철리였으며, 월드컵공원이 있는 매봉재산 아래에 가면 무쇠막골이 있었던 터였음을 표현하기위해 대장간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대부분 나루터와 가까이 붙어 있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금호 삼거리를 거쳐 다시 토끼굴로 진입하면 한강변 공원으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500여 미터 걸어가면 동호대교 아래에 다다릅니다. 동호대교가 있는 이 근처가 예전 두모포구가 있었던 곳이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만 해도 바닷물이 두모포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강 상하류에서 드나들던 배들이 많았고, 일본의 사신들이 이곳에서 내려 한양으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1970년대 이후 한강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사라지거나 섬으로 탈바꿈한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두모포와 중랑천합수부 사이에 있었던 저자도라는 섬입니다. 청계천과 중랑천의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제법 큰 섬이였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강남과 한강개발을 통해 저자도의 모래와 자갈은 압구정동일대 아파트건설용 자재로 사용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서울의 옛지도를 보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없어진 섬이 이 주변에 있었습니다. 또한 한강의 범람을 막기위해 제방을 쌓고 한강유람선을 다니게 하기위해 수위를 높이면서 흔적마저도 느낄 수 없을 만큰 너른 강이 되어버렸고 이모습이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한강입니다. 저자도가 있었을때는 한강의 모래가 너무 곱고 하얗다고하여 ‘백사장‘이라고 불리웠습니다. 한강의 수위를 낮추면 한강의 폭이 줄어들면서 백사장이 다시 나타날것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복원에 관한 얘기는 탁상위 토론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조선초기 두모포가 있었던 한강의 이곳은 물이 잔잔하다고 하여 동호(東湖)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놓여진 다리가 동호대교가 되었습니다. 한강에 놓인 15번째 다리이며 지하철 3호선과 차량이 같이 통행하는 대교로써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금호동을 잇는 다리입니다.


  동호대교를 지나가면 용산구 한남동에 다다릅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한강진이라는 나루가 있었던 곳이며, 한양도성을 나와 광주 및 용인을 거쳐 부산(동래)으로 내려갈 수 있는 영남대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배를 타고 갔던 나루터였다고 합니다. 한강진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이곳 유역을 ’한강’이라고 불리웠고 다른 지역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3강이라고 하여 양화강, 서강, 한강으로 불이웠고, 지역마다 부르던 이름이 달랐으며 이후에는 5강까지 명칭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경강이라는 명칭은 한성부에 권역에 속해있는 구간을 통칭하여 부르던 말인데 두모포부터 양화진 사이 구간을 경강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한강유역은 시대마다 다양하게 불리웠습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웠고 고려시대에는 ’아리수‘라고 불리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강‘이였고, 지금은 ’한강‘이라고 통칭하여 부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고 넓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서빙고의 어름은 어디에?

몇 년전 한국영화중에 호평을 받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람과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로 헐리우드 영화를 연상케하는 제목이지만 같은 이름으로 제작된 한국코믹사극영화 이기도 합니다. 이영화는 서빙고의 얼음을 탈취하여 탐관오리를 벌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얼음을 채취하는 장면과 보관했던 장소와 위치가 나름 자세히 보여졌던 영화입니다.



  한강진이 있었던 남산 아래지역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빙고(氷庫)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빙고는 경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하던 창고로써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된 관영 빙고였습니다. 빙고는 동빙고, 서빙고와 궁궐 안의 내빙고 두 곳 등 총 4곳에 설치되었으며 이 중 동빙고는 두모포 주변에 있었고, 서빙고는 매봉재산 남쪽 둔지산 중턱에 땅을 파서 반지하형태로 빙고를 만들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한강변에 있었던 빙고의 쓰임새는 달랐는데 동빙고가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하는 곳이라면, 서빙고는 왕실 뿐만 아니라 사대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나누어 줄 얼음을 보관했던 곳이였으며 규모에 있어서도 서빙고가 동빙고에 비해 12배나 컸습니다. 그러나 얼음의 빙질은 동빙고에 보관했던 얼음이 월씬 좋았습니다. 각 빙고에서는 한강에서 얼음을 채빙하고 저장하는 일을 경강 주민에게 부역으로 부과하였는데 이를 ‘장빙역’이라고 하였고 얼음을 채취하는 채빙공과 빙고에 저장하는 저장공은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숙련노동자를 고용했지만, 운반을 위한 노역은 품팔이 노동자를 고용하였다고 합니다. 장빙업은 빈민들이 겨울철에도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일거리여서 많은 백성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과연 빙고에 저장된 얼음의 용량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상상했던것보다 매우 큰 규모로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을 했었습니다. 조선 후기 네 곳의 관영 빙고에서 저장하기 위해서는 한강이 두껍게 얼기 시작한 11월부터 채취를 하는데, 대체로 두께가 4촌 이상되는 것을 선정하여 20만 정 내외로 보관했다고 합니다. 당시 기준으로 1정의 크기와 무게는 약 45X21X30cm의 크기로 재단하여 무게는 약 18~19kg 정도 였습니다. 총 보관양은 약 3,750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하절기에 사용된 얼음은 보관된 얼음양의 60% 정도 였으며 얼음이 녹으며 냉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나머지 얼음들이 보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관된 얼음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노인의 더위를 해결하고 병자들의 열을 식히는 약물, 장례에서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빙반설치용, 그리고 목욕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철에 다시 장빙하기 위하여 빙고 안팎을 풀잎으로 싸고, 빙고를 수리하였다. 영화에 내용을 보아도 얼음을 판매하거나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관했던 빙고를 하절기에 모두 소진하면 다시 장빙하기 전까지 창고를 수리하며 준비를 합니다. 



  지금도 이촌동 일대에는 서빙고라는 지명이 남아 있으며, 동빙고가 있었던 한강진 일대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한강진 일대는 기우제를 지낼 때 중요 장소로 인식이 되었던 곳으로 보름동안 기우제를 지내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한강진 사한단에서 마지막 기우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한강진 주변, 지금 이태원 일대에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던 부군당이 2군데 정도 남아 있어 우리가 찾아가 볼 수도 있습니다.

한강진 옆으로는 한남대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강남의 발전은 지금 한남대교 건너편 지역이 아니라 영동대교가 있는 청담동, 압구정동 일대가 먼저였으면 강남개발이 확장됨에 따라 지금의 신사동 자리인 사리진이라는 곳까지 개발이 확장되었습니다. 한남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나룻배와 큰 뗏목을 이용하여 사람과 차량을 운반하였습니다. 세월이 변하여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됨과 동시에 한남대교가 들어서니 한강진의 나루는 기능을 잃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루의 기능을 대교가 대신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남대교가 완공되었을때는 제3한강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의 일환으로 한강의 다리 명칭을 정리하면서 한남대교라고 변경되었습니다. 어느 가수가 불렀던 ‘제3한강교’가 어디였는지 아시겠지요. 

제3한강교 개통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 마지막 나룻배.1969년 12월
제3한강교의 모습


  한강 건너 잠원동과 고속버스터미널 사이에 9호선이 지나가는 길목에 사평역이 있습니다. 이동네 옛지명이었던 사평나루에서 유래된 역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평역이 있는 잠원동은 송파구에 있었던 양잠단지가 확장되어 설치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뽕나무를 관리하고 양잠을 하던 곳이라서 잠실동의 ‘잠‘자와 인근 신원리의 ’원‘자를 합성하여 잠원동이라 칭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남대교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한남역에 다다랐습니다. 한남역 또한 경의중앙선이 지나가는 작은 역사입니다. 출구가 하나뿐인 작은 역이며, 여기 주변에 조선시대 청나라 사신을 대접하고 관리들이 운영해왔던 정자인 ’제천정‘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한강 유람은 양화진에서 다시 얘기해 드리며 이번 한강길 일정은 한남역에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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