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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스물세번째

일상의 작은 쉼표 - 2

  선유도는 양화진 또는 양화나루가 있었던 강남의 나루터이자 부천과 김포, 강화, 양천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중요 시설이자 조선 후기에는 송파진(松坡鎭), 한강진(漢江鎭)과 더불어 한강의 3대 요충지를 이루었습니다. 선유봉이라는 큰 바위산아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바위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그 위치만 짐작할 뿐입니다. 선유도는 선유봉이 있었던 곳이자 양화나루가 자리잡았던 곳입니다. 평지화되고 한강의 원활한 물길 조성을위해 인위적으로 섬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하수처리시설을 갖춘 인공섬이 되었습니다. 한강에 사라진 섬도 많지만 인위적으로 생긴 섬으로 선유도와 노들섬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신선이 노닐던 선유도로 찾아가보려 합니다.          



 국도 1호선이 지나갑니다성산대교


  국도1호선이 갖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첫 번째 생긴 국도이기도 하지만 조선 10대 대로 중 서울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의주로가 있었던 자리이며, 남쪽으로는 삼남대로가 지나갔던 노선이기 때문으로 단순히 길이라고 얘기하기에는 너무나 긴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애초에 국도 1호선은 서울역을 가로질러 한강대교를 건너 장승배기와 대방역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시흥대로를 따라 수원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성산대교가 건설된 이후 노선이 변경되어 연신내역에서 연서로와 증산로를 따라 성산대교를 건너 서부간선도로를 따라가다 시흥대교 교차로를 이용하여 시흥대로로 접어드는 구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길과 도로는 지속적인 개선공사를 통해 시기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여 목포 신항이 있는 곳까지 이어집니다. 이처럼 성산대교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대교이자 서해안고속도로의 관문 역할을 함으로써 많은 차량이 이동하는 번잡한 곳이 되었고 현재는 서부간선도로 지하화 공사로 인해 더욱 복잡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한강의 다리는 교각이 많은 구식의 방법을 벗어나 디자인이 가미된 다양한 모습으로 곳곳에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산대교는 트러스트교로 성수대교가 비슷하게 생겼으며, 특히 어두운 밤에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대교입니다. 다리의 유래를 유추할 수 있는 지명이 주변에 있는 마포구에 위치한 ‘성산‘이 있으며 강서구에 있는 궁산의 옛 이름도 ’성산‘이였습니다. 성산대교 아래를 지나가면 한강공원 양화지구에 다다르고 한강위에 선유도공원이 눈에 들어 옵니다.          



 한강 상업의 중심지양화나루     


  한강은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강바닥이 높아져 점차 큰 배가 상류로 올라가기 힘들어졌습니다. 따라서 한강의 나루도 하류에 위치한 나루가 효용가치가 커지게되었습니다. 이에 영조때에  선유봉과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에 어영청 소속의 진영(鎭營)을 놓고 한강을 지키는 첫 관문으로 삼았고, 양화나루를 포함하여 주변의 공암나루, 조강나루까지 이 양화진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양화진에는 진병(鎭兵) 100명과 소속선 10여척을 두었고 중심은 잠두봉아래 양화나루였고 선유봉 아래는 진지는 없고 나루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풍경이 좋았기 때문에 뱃놀이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하며 그림으로도 여유로운 풍경의 모습만 있습니다. 바닷물이 한강을 따라 올라갈 수 있는 최대치가 마포이다 보니 마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 나루가 활기를 띄었고 상권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기준으로 수상/수하 지역으로 구분하여 유통하는 물건의 종류도 달랐고 모두 취합되는 곳이 마포일대 였습니다. 각 지역을 운행하던 배의 모양도 달랐는데 수하지역은 바다를 거쳐 올라오기 때문에 바닥이 뾰족한 반면에 수상지역의 배는 강을 따라 움직이다보니 배 바닥이 평평한 형태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수하지역의 주요 교역품은 미곡과 소금, 젓갈, 어물 등의 수산물이었고, 수상지역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물산이 공급되었고 곡물이나 땔나무 등이었습니다. 양화나루는 수하지역 중 가장 하류에 있었던 포구였습니다.          


신선이 놀던 선유봉이 있었던 자리선유도공원     


 한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선유도의 무지개 다리가 보이는 곳을 통하여 선유도공원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신선이 내려와 놀았을 만큼 강가에 매혹적으로 솟구친 선유봉과 한강의 모래사장은 19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허물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습니다. 선유도에 있었다는 선유봉은 작지만 아름다운 봉우리였다고 하며 해발 40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암석의 꿋꿋함을 칭송하여 '지주봉'이라고도 불렸다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화가인 겸재 정선은 이곳을 배경으로 '양화환도(楊花喚渡) · 금성평사(錦城平沙) · 소악후월(小岳候月)’ 등 3편의 진경산수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봉우리는 1925년 일제강점기 시기에 한강치수사업을 시작으로 대부분이 붕괴되었으며, 1978년 선유정수장이 설치됨으로써 옛 모습을 모두 상실하였습니다. 지금 국회의사당 주변 축대 등이 선유봉을 해체한 석재를 사용하였습니다. 대동여지도에도 선유봉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한강변의 작은 산으로 표현되었을만큼 아름다웠던 선유도는 한강개발을 통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1968년 본격적인 한강 개발이 시작되면서 선유도는 한강의 물길을 개선하기위해 백사장은 사라지고 인위적인 섬으로 바뀌었습니다. 1978년에는 선유도정수장으로 사용해오다가 2000년 선유도 정수장이 폐쇄된 이후, 물을 주제로 한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하고 산업화의 증거물인 정수장 건축 시설물을 재활용하여 녹색 기둥의 정원, 시간의 정원, 수질정화원, 수생식물원 등으로 구성되어 2002년 4월 26일에 선유도근린공원으로 문을 열면서 시민들에게 개방한 이후 많은 시민들이 찾는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특히 저녁에 바라보는 한강의 풍경이 멋드러진 전망대중 하나입니다. 선유도공원을 따라 자잘한 산책길이 갈래갈래 설치되어 있고 양화대교와 붙어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접근도 용이합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와 선유도공원 정문을 나서 양화대교 남단을 거쳐 한강공원으로 다시 내려가 11코스이 마지막 장소인 여의도로 갑니다.          



여의도공항을 아시나요여의도공원과 여의나루역     


  여의도에 들어서면 두 갈래 산책길이 나옵니다. 오른편길로 올라서면 여의도한강공원방향으로 가지만 직진해서 가면 샛강공원으로 갑니다. 예전에는 넓은 샛강이였지만 지금은 작은 하천정도로 보여지는 곳이 여의도 샛강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여의도는 금융과 관련된 빌딩이 가득한 곳이자, 한강에 가장 큰 섬이기도 하며, 최초의 고층빌딩인 63빌딩과 한강유람선을 탑승할 수 있는 곳, 윤중로벚꽃축제와 매년 개최되는 불꽃축제의 장소, 그리고 한강마리나리조트에는 크기가 다양한 요트가 정박하고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여의도는 어떠하였을까요? 조선시대에는 한강이 수위가 높아지면 범람하던 모래섬이라 방목할 때 사용하는 정도이기에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섬이였습니다. 그래서 일설에 ‘너나 가져라‘해서 너 여(汝)자에 어조사 의(矣)를 붙여서 여의도라고 불리웠다고 하며, 일각에서는 홍수가 나서 한강물이 불어 여의도가 잠길 때 높은부분만 살짝 내밀고 있어서 ’나의섬’ ‘너의섬’이라고 칭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여의도라는 섬은 쓸모없는 섬이라기보다 관리가 부실하여 아무나 사용하던 섬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입니다. 조선말까지는 가축이 달아날 염려가 없어 방목하기 좋았기 때문에 동물을 키우는 목축지로 사용되오다가 일제감점기인 1916년에 간이 비행장을 여의도에 건설하면서 여의도라는 이름이 문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 이탈리아의 공군 중위 페라린과 마지에로가 조종하는 공군기가 처음으로 여의도에 착륙하여 서울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적이 있으며 이를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아침부터 여의도를 가득 메웠다고 하며, 착륙한 조종사들은 악단과 무용수 등 극진한 대접을 받고 되돌아 갔다고 합니다. 이후, 1922년 안창남의 고향 방문 비행으로 인하여 여의도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 여의도비행장이 본격으로 정식비행장으로 사용되면서 일본-한국-만주를 잇는 항공수송의 주요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의도 비행장은 장마철마다 침수되는 문제로 1936년부터 이미 김포비행장(현재 김포공항)과 동시에 운영되었으나, 1958년 김포국제공항으로 여객 업무가 이관되고 공군기지는 1971년까지 남아 있다가 완전히 이관하게 됩니다. 한때 여의도 광장이 비행장 활주로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전의 사진을 보면 여의도비행장의 활주로는 동서로 놓여있는 형태로 존재했었습니다.      


   이러한 잦은 범람을 막기위해 밤섬과 선유봉에서 채취한 골재를 사용하여 제방을 쌓고 시영아파트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게 됩니다. 1970년대 이후 여의도와 연결되는 대교가 완성됨에 따라 섬이라기보다는 서울의 한 지역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사통발달의 금융거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여의도광장은 공원화를 통해 녹지공간을 확보하였고 이후 한강르네상스 개발을 통해 여의도지구 한강공원과 연결됨으로써 자유롭게 걸어서 이동이 가능한 공간으로 변신하였습니다. 너나 가져라하였던 섬은 결국 내가 가지면 최고인 섬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한강여의도공원은 수변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볼 수 있도록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어 여기만 걸어도 충분한 산책이자 자연스런 섬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11코스는 마포대교 아래 여의나루역에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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