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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명리학 -태극과 파동함수

태극과 파동함수태극과 파동함수

  지난번 글에서 오행의 시작 및 기호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풀었었습니다. 사주의 천간과 지지는 기호이며 기호와 운동,함축된 의미간에 관계를 설명한 것이 역학에서 말하는 신살과 12운성, 형충회합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부분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 태초, 태시, 태극에 대한 설명 중 태극이라는 부분이 현대과학의 양자역학의 시작인 파동함수와 개념이 유사하여 좀더 얘기해보려 한다.



 태극(太極) 이란?


  우선 태극이라는 말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말을 수시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의 국기가 태극기이며 태극의 문장을 사용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태극사상은 주역에서 시작되어 역학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조선의 유교의 기본 사상과도 연결이 된다. 태극을 설명한 글을 잠시 살펴 보자.

  태극은 무극과 같아서 혼돈 즉 무의 상태이기 때문에 만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원인 무극이 음양(양의)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태극이라 한다. 음양으로 분리된 것은 태극이고 분리된 음양이 결합한 것(원)은 무극이다(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임. 둘이면서 둘이 아님). 그래서 무극은 태극과 같다. 무극은 체(體)고 이(理)며 태극은 기(氣)와 용(用)이다.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 太極圖說≫을 지어 ≪주역≫에 나타난 본체관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려 했는데, 무극(無極)과 동정(動靜)의 개념을 첨가해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오행(五行)을 덧붙여 태극→음양→오행→만물의 우주론을 성립시켰다.  

 (중략)

그는 태극을 혼연(渾然)과 찬연(粲然)의 양면을 함께 지니고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초월적 근원자이면서도, 불교나 도가에서 말하는 허무(虛無)·적멸(寂滅)의 본체가 아니라, 빈 듯하면서도 있고(虛而有),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寂而感)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작용이 없는 고요함 속에 이미 능동성을 포함하고 있고, 이 능동성이 현실로 드러날 때 천하의 근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를 계승해 태극은 이(理)이고 만물에 앞서 있는 존재로 보아서, 이(理) 우위의 가치중시 철학을 정립해갔다.

한편, 이언적과 거의 동시대에 서경덕(徐敬德)은 이와는 다른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장자(莊子)와 장재(張載)의 영향 아래 주기적(主氣的)인 입장에서 태극을 해명하였다. 그는 우주의 본질을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고, 선천은 태허(太虛)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태허의 본질은 허(虛)인데, 이것이 곧 기(氣)라 하였다. 그러므로 선천에는 기만 존재하고, 후천에 드러날 때 선천의 일기(一氣)가 지닌 양면성이 동정을 통해 나타나는데, 그 원인이 바로 태극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언적과 서경덕의 태극관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황은 이의 능동성을 말한 이언적을 높인다. 즉, 태극은 음양·동정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불리성(不離性)을 말하면서도, 「비이기위일물변증 非理氣爲一物辯證」을 통해 이기의 부잡성(不雜性)을 강조하였다. 이와 달리 이이는 태극이 모든 변화의 근본 원인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태극은 독립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 속에 있다는 불리성을 강조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태극(太極)]


 결국 어떠한 사물을 이루는 본질이 무엇이고 어떠한 것이 우선인지를 논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졌을때 원자단위가 먼저 생겼을까? 아니면 이러한 원자를 구성하게 한 어떠한 에너지가 먼저 있었을까? 그래서 지금도 미립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최소의 단위가 무엇인지 어떠한 에너지형태인지를 연구하고 있다.  역학에서는 이러한 태극 사상에서 음양론이 나왔고 보다 세분화하여 오행과 천간과 지지로 구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부분이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성리학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다른 태극에 관한 글을 보면, 


 그는 태극을 혼연(渾然)과 찬연(粲然)의 양면을 함께 지니고 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초월적 근원자이면서도, 불교나 도가에서 말하는 허무(虛無)·적멸(寂滅)의 본체가 아니라, 빈 듯하면서도 있고(虛而有),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寂而感)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작용이 없는 고요함 속에 이미 능동성을 포함하고 있고, 이 능동성이 현실로 드러날 때 천하의 근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이야기이다. 불교 반야심경에 보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는 구절이 있고 대중가요 가사중에 '내꺼인듯 내꺼아닌 니꺼같은 나'라는 가사와 통하는것처럼 보인다. 존재하는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기도 하고, 안보인다고하여 없는것도 아니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를 든다면 우리가 매일 코를 통해 들이마시는 공기, 즉 산소일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것이 없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양자역학과 화학을 통해 살펴보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이중성


 양자역학 부분은 지난 음양론에서도 언급했었다. 태극을 설명할때도 양자역학의 한 부분을 통해  가능하고 유사한 개념이 존재한다. '입자의 이중성' 이라는 부분이다. 물질을 이루는 입자는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빛을 프리즘을 통해 비추면 무지개색을 제외하고 적외선과 자외선 등 가시광선 범위 밖에 빛으로 구분이 되는데 이러한 것은 빛의 진동수(파동)이 달라서 갈라져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개의 빛을 부딛히게 했을때 서로 튕겨져 나오는 산락각이 변하는것을 보고 입자성이 있음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는데 당시에는 두 개의 상반된 성질이 같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나타나는데 이를 증명하기 위해 파동함수를 도입함으로써 정리가 되었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입자라는 것은 어느 물질이던 기본이 되는것이며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파동성은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이다. 이러한 상반된 특성이 하나로 묶여 있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하지만 하나의 고유성질를 내포한다. 태극이라는 사상도 어느것이 우선인지를 따기지전에 두 개의 성질또는 운동성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존재하며 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둘 다 같아 보인다. 이보다 더 쉽게 예를 든다면, 원자를 구성하는 성분은 양자와 전자로 구성된다. 양자는 (+)의 성질을 가지고 잇고, 전자는 (-)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떨어져 있을때는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전자와 양자가 합쳐지면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가 되어 고유한 성질을 가진다. 양자와 전자가 '기(氣)'의 상태라면 원자는 '이(理)'의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고 원자는 전자와 양자를 합쳐 새롭게 변한것은 아니다. 품어있는 상태에서 다르게 발현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떠한 외부 자극에 의해 원자는 분해되거나 해리되어 이온(ion)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형태가 변할뿐이지 가지고 있던 속성은 그대로이다. 태극에서 무극이 되고 다시 태극이 되는 순환의 모습을 화학 반응에서는 수시로 발생한다. 


 또다른 과학의 시각으로 보면  '허무(虛無)·적멸(寂滅)의 본체가 아니라, 빈 듯하면서도 있고(虛而有),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寂而感) 존재로 이해한다.' 이부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와 전자 사이에 거리는 어느정도 떨어져 있을까? 원자마다 그리고 결합 방식에 따라거리차이가 있지만 아주 단순하게 수소분자(H2)를 기준으로 보면 약 37nm에 해당되는데 이대로 보면 어느정도 크기인지 감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양자를 확대하여 개미정도로 보면 전자는 잠실운동장 스탠드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양자 주변을 전자가 매우 빠른 속도로 돌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봤을때는 채워진듯 구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다가서면 빈 공간일 뿐이다. 빈 공간과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는 전자때문에 궤도함수를 통해 확률적인 위치를 계산하여 표시한것이 원자의 크기이다. 이렇게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다시 확대해보면 원자수준 > 분자수준 > 물질 크기로 커지면서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비어있는 공간이 꽉찬 물질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에서 얘기하듯이 '색'은 단순히 색깔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물질이나 형태를 가진 무엇인데, 이것이 비어있는 것이자, 비어있는 것은 물질이 된다는 얘기이다. 결국 역학에서 말하는 태극과 무극은 과학의 시선에서 바라보아도 틀린말은 아니다. 단지 고전 물리학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양자역학이 도입되면서 이해되기 시작한 부분이다. 결국 어떠한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동양철학과 과학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방식이라면 서양의 철학과 과학은 존재하는 것을 입증, 증거가 있어야만 설명이 되는 것이고 그외에는 있을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시작했기때문에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태극은 정지상태가 아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끊임없이 순환하고 변화한다. 그래서 일정하게 순환하는 모습을 알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미래의 사건을 유추할 수 있는데 이를 보다 세분화하여 기호화 한것이 오행과 천간과 지지이며 기호에 함축된 내용을 풀어내는 것이 역학인 것이다.



위 이미지 : 태극 문양(Yin and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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