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세균에 의해 발병하며, 쥐벼룩을 통해서 사람에게 감염된다. 그러나, 중세부터 근대까지, 미생물학이나 현미경이 발달하지 못 했을 때, 이 병은 냄새나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고 믿어, 페스트를 진찰하는 의사들은 새부리 모양의 기괴한 가면을 쓰고 부리 부분에는 향초 등을 넣어 냄새를 줄였다고 한다. 이런 병이 창궐하면 그 원인이 유대인이나 걸인들의 소행이라며 특정 계층을 박해하는 일도 흔했다.
성경에는 문둥병이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시리아의 장군이었던 나아만이 문둥병을 치료해달라며 이스라엘왕을 찾아오자, 곤란해 하던 왕을 위해 엘리사라는 사람이 신의 힘으로 물에서 목욕하는 방법으로 치료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렇게 질병을 '신의 저주' 혹은 '죄에 대한 댓가'로 생각했던 것은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기 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혹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던 때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었다.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자아를 혹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외부의 다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과학이 인간적일까? 입자와 질량과 중력과 전자기력을 연구하는 학문이, DNA와 전해질과 분자들간의 화학반응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간적일까?
나는 과학이 신학이나 인문학, 사회학 같은 어떤 다른 학문보다 오히려 훨씬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유전자의 연구로 우리가 인종이나 출신에 상관 없이 같은 사람이란 걸 알게 해줬고, 세균과 바이러스의 발견으로 질병의 신의 저주나 죄의 댓가가 아니란 걸 깨우쳐줬으며, 뇌과학과 정신질환 기전의 발견, 치료제의 발명으로 정신분열증이 귀신들림이나 마녀가 아닌, 아프고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알게 해줬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우리의 무지와 미신이다.
그 어떤 신이나 귀신이나, 어떤 인종, 출신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지의 결과이다. 그것은 과학을 모르고 굿이나 제사로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는 어리석은 옛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종교나 정치가 세상을 낫게 할까?
그 질문에 나는 때로는 종교나 정치가 세상을 나쁘게도, 때로는 좋게도 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과학과 의학은 결국에는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해 왔고, 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