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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사람 박코리 Apr 15. 2016

두 번, 아니 세 번 결혼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셀프웨딩 이야기

한 남자랑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사정상 그렇게 됐다. 셀프+스몰웨딩이 내겐 너무나 당연했다. 어른들에게는 철부지 장난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 다들 똑같은 웨딩을 하는 이유를 직접 겪고서야 알게 됐다. 나 역시 완강하게 반대하는 집안 어른을 이기지 못 했다. 포기하는 대신 추가로 한 번 더 결혼하기로 했다. 셀프+스몰웨딩을 하기까지 두 번의 웨딩을 거쳤다.

얼렁뚱땅 첫 식을 마친 후, 아무리 생각해도 웃겨서 빵 터졌던 순간

얼떨결에 첫 결혼을 했다, 혼인신고 날

첫 웨딩은 LA 소재의 어느 관공서에서였다. 우리로 치면 동사무소 같은 건물 안에 작은 방 한 칸 크기의 웨딩홀이 있었다. 남편은 회사서 밤을 새우고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혹시 몰라 챙겨갔던 원피스를 입고 결혼을 했다. 한 명은 바쁘고, 다른 한 명은 뭐가 뭔지 몰라서 그렇게 꽃 한 송이 없이 부부가 됐다.


2011년 6월부터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우리는 2014년 10월 부부가 된 후에도 일주일 만에 또다시 헤어졌다. 남편은 LA에 남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남편은 내 이민 절차를 밟고, 나는 한국에서의 웨딩을 준비하기로 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번이나 더 결혼식을 하게 될 줄은 물론 몰랐다.



두번째, 뭉클했던 '큰 웨딩'  

시부모님과는 이미 이야기가 된 상태여서 친정 부모님에게도 이러저러하게 작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말을 꺼냈다. 아빠는 수저를 내려놓고 네 맘대로 할 거면 결혼식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끝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혼식 때문에 부모님과 싸우는 게 내 이야기가 된 거다. 친구나 선배의 결혼식을 가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결혼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기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손님이 몇 명이 올지 또 누가 올지를 대략적으로도 알 수가 없다는 건지...... 주례사 없이 웨딩을 하겠다고 했다가 갈등의 정점을 찍었다. 결국 나는 아빠가 직접 찾아 계약을 한 여의도의 한 웨딩홀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아빠의 친구분께 주례사를 부탁드려서 아빠가 원하는 식순으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2015년 10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에 400여 명의 사람이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지만, 불편하기보단 뭉클한 시간이었다. 다음 식을 위해 부산스럽게 식장을 비워야 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폐백을 생략한 덕분에 식당에서 부모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 명 한 명 눈 마주치며 인사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의 수십년지기 친구분들도 뵙고 또 말로만 전해 들었던 아빠의 여러 모임 분들, 엄마의 오랜 고향 친구분까지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의 '큰 웨딩'의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말하던 대로, 셀프+스몰웨딩 한 번 더!  

여기까지만 했으면 두 번 결혼한 건데 한 번 더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빠가 원하는 대로 결혼식을 올렸지만 어쨌든 내 생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예쁜 웨딩'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웨딩 디렉터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저 남편을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에게 소개도 하고 여유있게 한두마디라도 나눌 수 있으면 했다. 수십 명이 먹을 음식을 요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대신에 차와 디저트를 나름대로 매치한 티 페어링을 직접 준비했다.

상수동 옥상꽃집의 테이블세팅- 나를 떠올리며 꽃을 꽂았다고 하셨다. 신부를 닮은 꽃이라니! :)
웨딩케익이 큰 이유는 신랑, 신부가 한 조각씩 잘라 함께 먹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토종 팥, 경주 최씨 가문 레시피를 이어받아 만든 울산 소월당의 차과자 '목단'_부부애와 번영을 의미하는 꽃이다.

서버가 몇 없어서 초대받은 하객들이 직접 음식을 날랐다. 케이크도 잘랐다. 축가 대신에 (친구들의 표현에 따르면) 말도 안 되는 연애 이야기를 남편과 내가 각자 준비해서 발표를 했다. 한국 식으로 노래를 부를까, 아니면 미국 식으로 춤을 출까 잠깐 고민했다 말았다.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조곤조곤 우리의 이야기를 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사회를 봐준 친구, 식 내내 차를 내려준 언니와 동생, 깜짝 이벤트를 해준 친구들에게는 지금도 고맙다.)



해피엔딩은 또 다른 시작

소나무 아파트 주민입니다!

어쩌다 보니 LA남자랑 시공간을 초월한 연애를 하다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LA에 산다. 웨딩 팡파르를 울리며 해피엔딩을 맞는 로맨틱 코미디와 다르게 웨딩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같이 사는 사람이 달라졌고, 사는 곳도 바뀌었다. 남편이라는 호칭이 조금은 덜 어색해지기도 했구나.


그래,이제 이다음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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