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전업주부, 2016년
서른을 코 앞에 둔 20대 후반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보는 사람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지루하겠다는 말을 한다. 처음 몇 번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젠 한 번 방긋 웃고 만다. 나름대로 하루를 촘촘히 산다. 오늘처럼 렌틸콩 카레를 만들다 포기하고 냄비째 버린 날은 제법 박진감 넘친다. 온 집안에 들어 찬 카레 냄새를 빼느라 진땀을 뺐다. 그 와중에 이불 빨래도 했다.
아담하지만, 둘이 살기엔 낙낙한 아파트가 나에겐 학교이고 도서관이고 회사다. 사실 주부가 되고 나서 공부를 더 많이 한다. 매일 뭘 해먹을지, 알루미늄 모카포트는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등등 공부할 것들 투성이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퇴근할 때까지 하루는 늘, 어김없이 훌쩍 가는데 왜 다들 내가 심심하다고만 생각할까?
주부가 되고 나니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까슬까슬하게 다가온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대개 일하는 여성과 일하지 않는 여성을 가른다. 일례로 영화 <인턴>에서 동네 학부모들로 그려지는 전업주부들은 성공한 온라인 쇼핑몰 CEO 줄리 오스틴을 깎아내리고 시기 질투한다. 심지어는 줄리가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줄리의 남편과 바람도 핀다. 예전 같았음 줄리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에게 몰입을 했겠지만, 지금은 전업주부로 사는 만큼 영화가 불편했다. 옷을 파는 건 중요한 일이고, 살림은 하찮은 일일까? 나는 당신들과 당신들의 일을 존중하는데, 왜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어떤 일을 하는지로 가격을 매기는 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닐까? 여러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까지만 해도 요리를 하기가 그렇게 싫었다. 셰프가 되어 직업상 하는 요리가 아닌 이상 주부가 되어 집에서 요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내 가치가 '0'이 되는 자리에 서는 것 같았다. 보는 눈이 없는 이 곳에 오고 나니 알겠다. 요리가 싫었다기보다는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들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게 두려웠다. 고작해야 두어 달 남짓이지만, 사실 요리는 공부할 것도 많고 재미있다. 그렇게나 다짐했건만, 나는 또 다시 내가 얼마 짜리인지를 의식하느라 나의 '오늘, 지금, 여기'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오늘 또 새로이 자유롭다. 언제까지 주부로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바지런한 일상이 뿌듯하고 기쁘다. 그러고 보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새해 첫 설교 본문이었다. 매일의 세월을 엿가락 늘이듯이 쭉쭉 늘려 쪽쪽 빨면서 일상의 단 맛을 보면서 살고 있다. 오늘 그랬듯 내일도 세월을 아끼고 누리며 지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