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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사람 박코리 May 03. 2016

난, (내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

20대, 전업주부, 2016년

서른을 코 앞에 둔 20대 후반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보는 사람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지루하겠다는 말을 한다. 처음 몇 번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젠 한 번 방긋 웃고 만다. 나름대로 하루를 촘촘히 산다. 오늘처럼 렌틸콩 카레를 만들다 포기하고 냄비째 버린 날은 제법 박진감 넘친다. 온 집안에 들어 찬 카레 냄새를 빼느라 진땀을 뺐다. 그 와중에 이불 빨래도 했다.

집에 혼자 있을 땐, 시계 대신 창문을 본다. 숫자 대신 빛이 시간을 말해준다.

아담하지만, 둘이 살기엔 낙낙한 아파트가 나에겐 학교이고 도서관이고 회사다. 사실 주부가 되고 나서 공부를 더 많이 한다. 매일 뭘 해먹을지, 알루미늄 모카포트는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등등 공부할 것들 투성이다.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퇴근할 때까지 하루는 늘, 어김없이 훌쩍 가는데 왜 다들 내가 심심하다고만 생각할까?


주부가 되고 나니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까슬까슬하게 다가온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대개 일하는 여성과 일하지 않는 여성을 가른다. 일례로 영화 <인턴>에서 동네 학부모들로 그려지는 전업주부들은 성공한 온라인 쇼핑몰 CEO 줄리 오스틴을 깎아내리고 시기 질투한다. 심지어는 줄리가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줄리의 남편과 바람도 핀다. 예전 같았음 줄리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에게 몰입을 했겠지만, 지금은 전업주부로 사는 만큼 영화가 불편했다. 옷을 파는 건 중요한 일이고, 살림은 하찮은 일일까? 나는 당신들과 당신들의 일을 존중하는데, 왜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어떤 일을 하는지로 가격을 매기는 건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닐까? 여러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까지만 해도 요리를 하기가 그렇게 싫었다. 셰프가 되어 직업상 하는 요리가 아닌 이상 주부가 되어 집에서 요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내 가치가 '0'이 되는 자리에 서는 것 같았다. 보는 눈이 없는 이 곳에 오고 나니 알겠다. 요리가 싫었다기보다는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들을 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게 두려웠다. 고작해야 두어 달 남짓이지만, 사실 요리는 공부할 것도 많고 재미있다. 그렇게나 다짐했건만, 나는 또 다시 내가 얼마 짜리인지를 의식하느라 나의 '오늘, 지금, 여기'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카페를 쏘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엔 베란다에서 바람을 쐬는 게 낙이다. 막간의 간식은 언제나 꿀맛!

오늘 또 새로이 자유롭다. 언제까지 주부로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바지런한 일상이 뿌듯하고 기쁘다. 그러고 보니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새해 첫 설교 본문이었다. 매일의 세월을 엿가락 늘이듯이 쭉쭉 늘려 쪽쪽 빨면서 일상의 단 맛을 보면서 살고 있다. 오늘 그랬듯 내일도 세월을 아끼고 누리며 지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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