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물락꼬물락거리고 있다.
안녕! 내 영혼의 도시, 서울.
건강상의 이유로 급하게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에 돌아오니 LA에선 잊고 살던 나이가 새삼스럽다. 서른이다. 서른이 되었다. 서른 즈음에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서 푸른 잎이 달린 가지를 길게 뻗고 있을 줄 알았다. 일산에서 태어나 초, 중, 고를 다니고 직장도 일산에 있어서 친정 바로 옆에 집을 장만한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매일 쫑알대며 돌멩이를 차고 다니던 십 대의 어느 날처럼 팔짱을 끼고 걸었다.
평생을 한 자리에서 살다 영영 정착한 친구를 보니 서울에서 계속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궁금해졌다. 서울에서, 엄마와 동생을 이틀에 한 번씩은 꼭 만나 밥을 먹고, 아이를 낳아 친구들과 함께 키우는 삶은 어땠을까? LA와 서울, 두 도시의 경계를 오가며 살고 있는 내게도 덜컥 살게 된 도시, LA를 나의 도시라고 말할 날이 올까? 이 곳도 그곳도 아닌 그 경계가 내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에 오니 LA 생각이 안 나고, LA에 가면 서울 생각이 안 나는 거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햇빛을 누리며 사는 법을 배웠다, LA에서-
틈날 때마다 서울 곳곳을 누빈다. 어디를 가건 서울에 살던, 20대의 나를 만난다. 20대를 살 때는 몰랐는데 돌아보니 내가 너무 안쓰럽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말을 해주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늘 조급했다. 가만히 쉬지를 못 했다.
며칠 전엔 한강에 냉장고에 있는 과일을 씻고, 옥수수를 쪄서 소풍을 나갔다. 정겹고 즐거웠다. 사실 LA도 서울 못지않게 숨 가쁜 속도로 돌아가는 도시이다. 다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삶을 영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 템포 느리게 사는 일상을 선물해줬다. 새로운 도시, 그곳에선 내가 나에게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었다. 피곤하면 잠이 안 와도 가만히 누워있다가, 지루해지면 온 집 안의 창을 다 열어놓고 차 한 잔을 홀짝이며 햇빛을 누렸다. 토요일이면, 친구 집에 놀러 가 난생 처음 해보는 요리를 해서 나눠먹는 작은 행복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잘 하는 것만 하려 했던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달라지긴 달라졌다.
아름다워서 짠하다, 나의 서울은-
눈썹을 휘날리며 서울의 카페들을 다닌다. 밥은 엄마 밥이 제일 좋아서 집에서 먹어도 기분은 카페에서 내고 싶다. 감각 있는 곳들이 많아서 고르는 게 일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의 방에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카페마다 개성을 담뿍 담은 메뉴들이 나온다. 한 잔 마실 때마다 고맙다. 그 한 잔에 기울였을 정성과 고생이 비춰서 송구스럽기도 하고.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렸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유행이 빠르게 지나간다. 서울에 다시 올 때면 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까? 6개월 전만 해도 힙했던 카페가 텅텅 비어있기도 하고, 고새 새로운 곳들이 열풍을 끄는 걸 보니 착잡했다. 누군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가진 걸 다 걸어서 하나의 카페를 겨우 오픈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가득 차 있던 공간이 어느 날부턴가 텅 비어있다면, 얼마나 허하고 막막할까?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자영업자라는 이 곳에서 수없이 많은 카페가, 가게들이 소리 소문 없이 개업을 했다 폐업을 한다.
LA의 동네 카페나 베이커리들은 대개가 투박한 편이다. 멋들어진 카페에 가려면 운전을 해야 한다는 게 불편했지만, 익숙해지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어딜 가든 나른하니 편안하다. 남편이 초등학생 때부터 들락날락했다는 도넛 가게는 글자가 몇 개 떨어진 간판 그대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하다. 나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인 서울의 카페들이 언제 돌아오더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순 없는 걸까?
서울의 힘, 내 안에 새겨가야지.
완벽하지 않은데 완벽주의자인 내게 시작은 참 어려운 일이다. 자꾸 미루고만 있는 일이 있는데 시작을 하자니 주저하게 된다.
다음 주 토요일이면 다시 LA에 돌아간다. 치열해서 아름답고 짠한 도시, 서울- 서울의 에너지가 이번엔 나를 짓누르는 대신 오히려 충전을 시켜줬다. 떠나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걸까? 서울의 힘을 몸과 마음에 새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