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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스 Sep 24. 2024

정말 가을이 온 걸까?

기후 우울증이 가져온 불안신경증

해마다 그래왔듯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악스러운 폭염이 쉽게 자리를 내줄리 없었고, 결국 질긴 더위를 끊어낸 건 태풍에 얹혀온 폭우였다. 하루를 낮과 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날, 여름이 물러남을 피부가 먼저 알아챘다. 밤새 바람이 어둠을 치대어 숨통을 틔웠고, 나는 새벽녘에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기며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가을이네.’     


그야말로 느닷없이 가을이 왔다. 등 뒤에 숨긴 꽃다발을 받은 듯 우선은 반가웠다. 힘 빠진 햇살에 낮아진 기온, 이름 모를 나비들이 상사화 잎을 어르며 날갯짓하고, 떨어진 밤송이에 놀란 들고양이가 줄행랑친다. 남겨둔 포도송이에 벌과 새가 기웃거리고, 군데군데 새빨개진 고추에 깜짝깜짝 놀란다. 오이와 호박은 시든 이파리 속에 마지막 열매를 숨겼다. 결실을 바라는 마음도 익어가고, 이렇게 가을이 올 것을 믿고 한여름에 무와 배추도 심었다.


할 일이 쌓였다. 그동안 핑계가 많았다. 비가 와서, 뜨거워서, 더워서... 여름내 흐물흐물해진 정신머리 때문에 본분을 잊었다. 벽돌 틈으로 길게 자란 풀들이 발목에 스칠 때마다 시골 사는 뜰지기로서 무척 민망했다. 흥건한 게으름의 흔적이고 폭염에 패배한 잔해들이다.


이리저리 마당의 부름을 받는다. 피었던 그 모습 그대로 쇠잔하여 박제된 벨가못과 밤비노, 루드베키아 씨앗을 받고, 땡볕 아랑곳없이 은밀하게 자라난 닭의장풀, 바랭이, 강아지풀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씨앗을 뿌린다. 금어초, 유채, 양귀비, 자운영, 달래... 내년을 품은 씨앗이다. ‘내년이라...’ 장담하기엔 너무 먼 시간일까? 



정말 가을은 온 것일까? 아침저녁 찬 공기가 반갑지만 언뜻 스치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바뀐 계절에 대한 대가는 다 치른 것일까? 지금의 평화로운 시간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극한의 더위와 추위, 폭우와 폭설을 움켜쥔 제5, 제6의 계절이 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예측이 가능한 계절은 이제 기대할 수 없게 된 것 아닐까? 


뉴스시간당 60mm 이상의 극한 호우만 50여 차례, 북쪽의 찬 공기가 더운 공기와 충돌하여 정체전선, 남쪽 태풍에 수증기가 유입되어 장마철보다 더 많은 비가 전국 곳곳에 내렸다. 일기예보관의 해설은 이미 도심이 마비되고 농촌 곳곳이 무너지고 잠긴 지 하루가 지난 뒤였다. 내게도 올 수 있는 불행에 알람은 없다는 소식이다.


기후 우울증이 도진다. 비를 바라면 흙탕물은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환경 파괴에 대해선 인간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여전히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중심엔 인간의 기술로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이라 부른다.


‘작아서 그리고 바빠서 어느 누구도 꽃을 보지 않는 세상에, 꽃 한 송이를 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커다랗게 그렸다’는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말처럼, 달이나 화성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지구를 좀 더 오래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부질없다. 리더란 세상을 망칠 만한 힘을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들로 보이는 요즘이다. 먼저 스러지는 것은 언제나 약하고 순한 것들이다. 누군가 말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그렇다 해도 불쑥 찾아오는 안타까운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


가을이 왔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다른 생각 없이 그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이제 조금 친숙해진 마당에서 허락되는 시간까지 머물고 싶을 뿐인데... 재앙도 이 가을처럼 느닷없이 닥치는 건 아닐지, 좋은 계절이 왔건만 기후 우울증에 걱정만 늘어 간다.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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