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초여름, 시골집을 샀을 땐 어떤 나무들이 자라는지 잘 몰랐다. 가짓수도 많고 처음 보는 나무도 많은 데다가 뜰이 앞뒤로 나뉘어 있어서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말에 내려와 잔디마당과 꽃밭, 텃밭을 오가다 보면 이틀이 휙 하고 지나갔다. 도시에 묶인 시간이 더 많은 5도 2촌 생활이었다. 뒤뜰에 과실수가 있는 건 알았지만 신경 쓸 겨를 없이 한 계절이 갔다.
어느 날 발끝에 차이는 밤송이를 보았고, 시골의 가을을 제대로 맛보게 해 준 것은 이 밤나무였다. 그해 가을, 밤송이 주렁주렁 열린 밤나무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꽉 차오르던지. 따스한 갈볕 아래에서 밤송이를 까는 내내 행복했다. 땅바닥에 깔린 보물을 줍는 기분으로 헤벌쭉 댔던 기억이 새롭다.
오늘로 사흘째, 밤송이를 까고 있다. 깐다고 말하지만 그건 익어 벌어진 것들 얘기다. 벌어진 건 쉽게 발리기에 그런 걸 발견하면 반갑다. 나머지 반쯤은 앙다문 채로 있다. 양발에 힘을 주어 제쳐야 하는데 손을 쓰지 못하니 쉽지 않다. 자꾸 발바닥 아래서 짓이겨진다. 뜻대로 되지 않아 허리가 땅긴다. 아무래도 지금은 3년 전에 비하면 감흥이 조금 덜하다.
성가시다가도 윤기 자르르한 알밤이 가시 틈새로 삐져나올 땐 쾌감도 같이 터진다. 그 맛에 양동이 가득 채워온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탐스런 밤송이는 더 이상 담을 공간이 없을 때 나타난다. 욕심내서 손으로 가시 끝을 집어 올리려 하면 꼭 한 번은 찔리고 만다. 찔리면 두고두고 피부가 아리다. 나무 바로 아래서 위를 쳐다보지 말 것. 눈은 뒤통수보다 약하다. 잘 마른 껍질은 불쏘시개로 그만이다. 간혹 밤알이 섞여 들어가면 불 속에서 소형폭탄이 터질 수 있다.
독말풀이나 여주에도 가시 달린 열매가 있지만 밤송이와 비교하면 가시랄 것도 없다. 오랜 세월 밤나무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진화의 과정에서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토록 날카로운 가시로 씨앗을 감쌌을까? 꽁꽁 숨기는 것도 모자라 한 번 더 단단한 껍질로 감싼, 철저한 방어 자세 뒤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자신이 매단 열매가 얼마나 맛난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땅에 떨어진 밤송이는 너무 늦지 않게 주워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레들이 잔치를 벌인다. 가끔은 멀쩡해 보이는 것도 껍질을 벗기다가 보면 살찐 애벌레가 꿈틀거려 기겁한다. 벌레들도 취향이 있고 맛집을 찾는다. 열매를 맺기 전, 껍질이 약할 때 씨방 속에 알을 낳기 때문에 밤 속에서 알이 같이 자란다. 주로 밤바구미(꿀꿀이바구미), 밤애기잎말이나방이라는데 이름도 참 통통하다.
애들이 어렸을 적엔 일부러 밤 농가를 찾아가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 가을 추억을 만들려는 마음이었다. 농원 입구에서 반출량을 제한하는 양파망을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작은 그물망을 받아 들자 이내 모든 게 바뀌었다. 그물이 터지도록 담느라 대낮인데도 눈에 불을 켰었다. 본전 건졌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가져와 보면 절반 가까이는 벌레 먹은 것들이었고.
이젠 뒤뜰에 밤나무를 키운다. 아니 십수 년 자란 나무는 저 혼자 알아서 크고 열매 맺는다. 집주인이 누구고 어떤 사람인가 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러면 이 밤송이는 불로소득인가 아니면 임대소득인가? 헨리 조지에 따르면 자연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범죄다.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불로소득이라고 고백하려다 얘기가 엇나갔다.
그런데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은 땅보다 가지 끝에 있다. 밤꽃이 핀 것은 봤는데 언제 어떻게 가시 돋친 열매로 변해가는지 그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사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하얀 주렴 모양의 밤꽃은 수꽃이다. 정확히는 암수 한 그루이니 그 속에 숨은 암꽃을 추적해야 한다. 밤톨을 완성하는 것은 암꽃이 아닌가. 궁금함이 한결같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마음을 놓아버리니 때를 놓치고 만다.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생으로 먹든 삶거나 구워 먹든 떫은 속껍질, 보늬만 손쉽게 벗겨낼 수 있다면 구황식품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품종에 따라 좀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이 다르다. 수분 함량이 많은 '병고밤'은 생밤으로, 단단하고 겉껍질이 얇은 '옥광'과 '대보'는 군밤으로, 속껍질이 잘 벗겨지는 '수락밤'은 삶아 먹기 좋다고 한다. 어쩌면 밤 막걸리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밤톨이 작년만큼 실하지 않다. 작년엔 한 송이에 굵은 밤알이 한두 개 들었었는데 올핸 대개가 세 개씩 들었다. 개수보다 크기가 중요한데 말이다. 기후변화에 치이면서도 열매를 열고 익은 것만도 다행스럽다. 앞으로 이보다 더 심각한 여름이 온다고 하니 잘 견뎌내리란 기대의 말도 함부로 못 하겠다.
폭우와 폭염에 초가을이 폭삭했다. 냅다 가을 깊이 들어섰다. 계절 변화의 징후가 없던 가을은 처음이다. 마당엔 막자란 풀들이 어느 해보다 무성하다. 숨통을 터주고 나니 도깨비바늘이 옷깃에 들러붙어 살을 찌른다. 내년엔 내 피부에서 싹이 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가을이라고 한 철 꽃무릇이 만발하고 태양이 순해지니 그나마 반갑다.
가을을 느끼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밤나무 한 그루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숙한 밤나무는 더 이상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다. 스스로 다른 생물에게 베푸는 자연이고, 계절의 변화를 몸소 보여주는 지표다. 매년 풍성한 열매를 주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아니라고?). 그러고 보니 아파트 조경수로는 밤나무를 본 적이 없다. 이왕 이렇게 시골에 사는 김에 그 충만함을 실컷 누려야겠다.